그래 우린 식구(食口)다.
아들 둘은 홀아비 자식으로
딸 하나는 홀어미 자식으로
쓸쓸해서 허기진 밥으로 살다가
오붓한 식탁 꽉 차게 둘러앉으니
쓸쓸하지도 허기지지도 아니하네
이젠 귀가 길이 두렵지 않으리
이젠 외로움에 결박당하지 않으리
아픈 눈물 서로 닦아주는
그늘지지 않게 서로 밝혀주는
누가 뭐래도 우린 한 식구다.
(졸시 ‘우린 식구다’ 전문)
지난 10월 무렵입니다. 40대로 보이는 노숙자가 세종문화예술회관 뒤쪽 편의 한 식당이 길에 내놓은 음식 쓰레기를 집어먹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표정의 그 사내의 먹는 행위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음의 구렁으로 떨어지기 위해 독식(毒食)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동안 음식 쓰레기를 집어먹던 사내는 비척거리며 광화문 사거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지하철 역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물론 그가 좀 더 심각해 보였지만) 노숙자와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곱씹어 보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노숙자에 대한 동정보다는 가장이었을지도 모를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 사내도 애초에는 노숙자가 아니었을 텐데…. 그에게도 희망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그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가족이 있을 텐데…. 자녀가 있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가족들은 그를 걱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집 나간 가장에게 원망과 증오를 퍼붓고 있을까?
저는 음식 쓰레기를 집어먹는 그가 떠오를 때마다 '내가 저렇게 됐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저 사람이 됐을 지도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소름끼치듯이 파고들곤 했습니다.
2006년 8월, 식탁에는 다섯 식구가 둘러앉았습니다. 당신은 아내가 되어주셨고, 당신의 딸은 저의 딸이 되었으며, 저의 두 아들은 당신을 잘 따르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자칫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바닥에 처박힌 채 끝장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살던 제게 새날이 온 것입니다.
떠넘겨진 부채와 배신으로 인해 분노와 증오를 마음에 품고, 날선 칼을 쥔 듯이 깨진 유리조각을 품은 듯이 살벌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불혹이 되도록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하지 못했는데 당신으로 인해 적의감은 햇빛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위로가 옛 일을 점차 잊게 합니다.
당신과 함께 새해를 맞았습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현관 앞에는 여러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고, 빨랫감은 자주 쌓여서 세탁기는 부지런히 돌고, 먹성 좋은 아이들은 따뜻한 밥상에서 고봉밥을 먹고는 평안한 휴식을 취합니다. 북적거리는 가정에 온기가 그득하니 사람 사는 것 같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새해 새 날을 맞으면서 올해의 해야 할 일을 되새겨봅니다. 올해 우리 집안은 2학년이 한 명, 3학년이 세 명이나 되는 막중한 학생 가정입니다. 06학번인 제가 2학년이 되고, 큰아들과 딸이 고3, 막내아들이 중3이 됩니다. 무엇보다 고3이 두 명이나 도니 그야말로 발등의 불이 두 배나 떨어진 셈입니다. 가장 걱정은 챙겨야 할 학비인데 이를 담담하게 감내하는 당신이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새해 두 번째 주일 저녁, 칼국수를 맛있게 준비한 당신 덕분에 다섯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행복한 식사를 하면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새해 계획을 세웠던 아이들은 각오를 거듭 다지고, 당신은 상처 입고 아파했던 아이들이 세상에 값지게 쓰임 받는 재목으로 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이들의 그늘진 표정 어딘가에 숨어 있던 두려움과 무거움은 사라지고 안도감과 안온감이 아이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을 먹습니다. 잠을 자는 게 아니라 평온의 안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불을 켜고 공부하며 꿈을 키웁니다. 한 식구 한 형제자매로 서로 용납하는 저 착한 아이들을 더 이상 아프게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아픔도 슬픔도 있었고 외로움과 분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 것들은 지워버리고 새 것들과 함께 씩씩하게 살자는 당신의 위로와 격려 덕분에 부족한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형편없이 부족하기만 한 제가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가는 길에서 제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금 새겨봅니다.
[2009/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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