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싸준 도시락을 먹어본 친구들이 아빠 요리 솜씨 최고래요!"
"어떤 친구는 자기 엄마 요리 솜씨보다 훨씬 낫데요. 아빠 최고예요!"
제 열성 팬인 고1 막내아들의 칭찬입니다. 아들딸 모두 제 요리솜씨에 대한 지지자들인데 주 종목은 애들이 좋아하는 떡볶이와 김밥입니다. 아빠의 요리솜씨에 반한 딸은 분식집을 차려도 되겠다고 높게 평가하지만 아내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프로 세계에 뛰어들기에는 2% 정도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얘들의 칭찬에 착각해서 분식집을 차리겠다고 오버할까봐 못 박아 두는 겁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와 가족에 대한 정성은 갸륵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두 아들을 혼자 키울 때도 초밥, 상추밥, 김밥 등으로 도시락을 싸주곤 했습니다.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은 요리백과엔 없는 독특한 상추밥 도시락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밥과 야채, 참치를 볶은 다음에 상추로 곱게 싸고 묶어 도시락을 싸주었는데 맛과 모양 모두에서 합격점 이상을 받았던 같습니다. 밥에 관한 한 전근대적 사고의 소유자인 저는 '밥은 사랑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홀아비 궁상이라고 흉볼지라도 도시락을 싸주었던 것입니다.
방학도 없이 공부에 바쁜 막내아들과 가족을 위해 김밥을 준비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점심을 먹은 뒤 학교에 가서 보충수업이 끝나면 곧 바로 학원수업을 받으러 갑니다. 그리고 밤 10시쯤 귀가합니다. 용돈(월 5만원) 외에는 밥값을 따로 주지 않기 때문에 떡볶이나 라면으로 떼 우기도 하지만 용돈을 아끼려고 저녁을 거르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묵묵한 막내에게 아빠표 도시락으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김밥 싸기 그리고, 딱딱해진 김밥 처리하기
제 약점은 분량 조절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찌개를 끓이거나 밥을 할 때 아내에게 지적받는 부분입니다. 적정량이라고 나름 판단하고 물을 붓고 국을 끓이기 시작하지만 재료들이 들어가는 순간 차고 넘쳐서 다시 큰 냄비로 옮기고, 또 큰 냄비로 옮기면 국물이 부족해서 물을 붓고, 이러다보면 족히 일주일 양의 찌개거리가 되고 맙니다.
어제(9일)는 김밥을 쌌습니다. 밥은 아내가 했는데 열 공기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을 제가 우겨서 열 세 공기를 안치게 했더니 설익은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병사는 용납할 수 있어도 배식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다는 강박의 배식관이 낳은 결과입니다. 결국 조촐한 김밥 싸기가 일이 커지면서 대형공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무쳐 놓은 시금치에다 오뎅, 당근, 햄, 계란 등을 볶고 단무지를 깨끗이 씻고 썰어서 배열을 한 뒤 김밥을 말기 시작했습니다. 새 중에 가장 무서운 새는 먹새라는 것 잘 아시죠. 아빠의 김밥요리 팬인 두 아들과 딸이 싸는 족족 집어 먹는데 싸기 바쁠 정도입니다. 밥은 한 공기 또는 3/2 또는 3/1 공기에 족하지만 김밥은 가늠 없이 먹기 때문에 입에 붙으면 정량의 몇 배를 먹게 됩니다.
통 큰 아빠의 김밥 싸기가 계속되자 얘들은 포만한 배를 두드리며 물러났고, 아빠가 싸준 김밥을 챙긴 막내아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도 스무 줄 가까이 쌓였습니다. 제가 만든 '햇살 따스한 평온의 뜨락'표 김밥은 시장 김밥보다 두 배 정도의 두께입니다. 그러니 양이 적은 딸내미는 한 개만 먹어도 너끈합니다. 아내는 김밥을 먹을 기대감으로 총알 같이 퇴근했습니다. 그렇게 원 없이 먹고도 8줄 가량 남았습니다.
오늘(10일) 아침 식사도 김밥이었는데 김밥이 쉴까봐 베란다에 내놨더니 차갑고 딱딱한 몽둥이처럼 변했습니다. 요리사는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대처법을 갖고 처리할 줄 알아야 진정한 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 딱딱해지면 그릇에 계란을 풀어 김밥에 옷을 입힌 뒤에 프라이팬에 굽는데, 오므라이스 같은 원리라고 할까요. 오늘은 계란 옷을 입은 퓨전 김밥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로 가는 아들의 표정은 행복 99점입니다.
한 놈만 팬다!는 선택과 집중의 전술을 요리에 적용합니다. 가족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싶다면 그 음식이 질릴 때까지 계속 공급합니다. 다양한 요리를 전개하기에는 요리 경력이 짧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큰 불만이 없습니다. 저는 음식에 대한 평가를 즉각 요구하는 편인데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불만이 제기되면 태업에 돌입합니다. 가족 사랑의 일념으로 준비하는 아빠의, 남편의 요리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햇살 따스한 평온의 뜨락' 식솔들의 성원에 힘입어 행복한 살림은 쭉 계속됩니다.
아내의 결혼이 '미친 짓'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딸은 몸도 약하고 살림도 할 줄 모르는데 자네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어머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살림도 아주 잘하고 요리도 잘합니다!"
"사내가 무슨 살림을 한다고 그래! 됐네, 됐어! 아니, 이 사람아 내 자식도 키우기 힘들어 내팽개치기 일쑤인데 남의 자식을 어떻게 키운다는 말인가!"
아들 둘 딸린 홀아비가 나타나자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장모님은 정색하며 새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장모님의 반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재산이라도 많이 모아놨다면 모를까, 배우기라도 많이 배웠다면 모를까,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월등하다면 모를까…. 그야말로 개뿔도 없는데다 혹이 둘씩이나 딸린 홀아비에게 딸을 맡길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한 사람의 관객이 있더라도 무대를 떠나지 않겠다는 무명배우의 다짐처럼 장모님과 아내의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단 한 사람의 지지자가 있었기에 저의 열애는 난관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지지리도 없었기 때문에 아내의 사랑에 보은(報恩)하는 길은 몸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생활에 지친 몸 약한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 밥을 차리고, 아내보다 먼저 귀가해서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 빨고 개는 등 안온한 집안을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겪은 싱글맘 또는 이혼여성들은 저주하듯 이렇게 단언합니다. 사뭇 사실입니다. 사랑은 달콤한 초콜릿이기도 하지만 내포되어 있던 식중독 포도상구균이 발병하면 사랑했던 사람이 적보다 더 증오하는 공격대상이 되고, 안식처는 귀가하기 끔찍한 지옥이 됩니다. 원수는 집안에 있다고 했듯이 자신의 치부를 가장 잘 아는 가족 특히, 아내와 남편이 등을 돌리면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은 고금을 통 털어 사실입니다.
한 번의 실패면 족하지 또 다시 미친 짓을 한단 말이야!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갖춘 여성은 홀로 살기에 부족함 없기에 소위 '미친 짓'에 휘말릴까봐 매우 경계합니다. 아내 또한 홀로 사는 데 부족함 없는 캐리어우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편안한 물적 토대들은 영혼의 외로움까지 달래주지 못합니다. 희희낙락의 하루를 마친 뒤 홀로 돌아와 홀로 잠들고, 홀로 깨어 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쓸쓸함과 목메임….
아내의 결혼이 '미친 짓'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업이었습니다. 경제활동과 살림, 남성의 권위와 차별 따위 등 여성에게 중층적 부담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잔재가 남은 사회에서 제가 선택할 것은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결혼생활이 짐이 되지 않도록 살림 부담은 물론 정신적 피로를 주지 않도록 세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못난 소나무가 고향을 지키듯이 못난 제가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밥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등 살림살이와 아내의 어깨 주물러주기, 발 마사지 해주기, 바디로션 발라주기 등 손쉬운 소통의 방법뿐입니다.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정성에 아내는 행복해 합니다. 수술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아내가 거들어줍니다. 최근엔 시집(詩集) 원고정리로 살림에 소홀하게 되자 아내가 구원투수로 등판해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한 끼니의 밥은 허기를 때우는 식량만은 아니라는 것. 세탁소와 파출부, 배달음식, 외식, 쇼핑 등의 편리함이 살림의 거추장스러움을 덜어줄 수 있지만 결코 생활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情)과 온기가 없기 때문에 떠다니는 섬처럼 표류하는 21세기 바다에서 '햇살 따스한 평온의 뜨락'호는 사랑의 식탁과 안온한 살림으로 인해 행복한 항해 중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딸아들아, 아빠의 살림 솜씨와 음식 솜씨 정말 괜찮은 거야!
사랑하는 아내여, 못난 사내의 살림 솜씨와 소통이 그댈 행복하게 하나요!!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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