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목사]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 (1940-1945)
주기철의 순교: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 (1940-1945)
번하이셀이 평양을 떠난 후 1941년 9월부터 1944년 4월까지 계속된 마지막 투옥 기간 동안, 소양은 자기와의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그 고독한 감방에서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과 그로 인한 후유증, 끊이지 않게 괴롭히는 육체적 아픔, 그리고 열악한 감방의 식사로 소양은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정작 죽음 앞에 선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의 권세”도, “지루한 고난”도, “의를 위한 죽음”도, 그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노모와 처자”의 장래였던 것이다.
고독한 감방에서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하루하루 병고와 싸우며 생명을 부지하던 소양의 1944년 4월 13일자 유언은 가족들의 장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생명보험을 든 2백 원으로 큰 아이 영진이 장가보내도록 하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하여 드리고……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소양은 이 유서를 한국인 간수 안태석을 통해 오정모에게 전달했다. 이것을 받아 든 사모 오정모의 첫 마디는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였다. 그녀는 두 번째 검속되어 오랜 감옥생활에서 풀려난 소양에게 “승리요? 다시 감옥에 들어가시오. 어서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시오.”라며 첫 마디를 건넸다. 오정모, 이미 그녀는 한국교회의 장래가 소양에게 달려 있음을 너무도 뼈저리게 간파하고 그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녀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엄청난 신앙의 결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냉철함,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투지 그것은 인간 오정모, 그녀를 여타의 여자와 구별 짓는 특성들이었다.
소양은 돌박산의 진달래가 한창 피어오르던 1944년 4월, 아내와 마지막 면회를 끝낸 그 다음날 21일 오후 9시, 노모가 꿈에 예견한 대로, 그리고 그가 이미 8일 전에 예견한 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갔다. 드디어 “주님께서 순교자의 면류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심으로 소양은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거룩하고 영광스런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나를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 달라는 유언대로 그는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평양 돌박산에 평안히 잠들어 있다.
주기철의 순교 그 이후
주기철의 순교는 마치 폴리갑의 순교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순교적 신앙을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다. 교회당이 폐쇄된 후에도 뜨거운 신앙으로 결속하던 산정현교회 교우들은 주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온 교인이 일경의 감시를 무릅쓰고 그 장례식에 참여하여 또 한 번 일치된 뜻을 드러내었다.” 주 목사가 순교한 이후에도 교우들이 흔들리지 않고 지하 교회를 형성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교회당 사용을 허락하고 신앙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겠으니 신사참배를 하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에 일제는 교회당을 평양신학교 학생들에게 사용토록 허용하였으나 이도 오래가지 못하였고 마침내 천주교회의 성당으로 넘겨주겠다고 하다가 이도 여의치 않자 일본군의 주둔 막사로 사용하고 말았다.”
도전을 받기는 산정현교회 교우들만은 아니었다.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들은 최덕지 전도사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더욱 기도하고 싶어 또다시 독방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독방을 또한 주셨다.”고 증언한다.
회고록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안이숙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한 주기철의 죽음이야말로 “20세기 세례 요한의 죽음”이라고 단언했다. 주기철을 주님의 공생애를 예비하며,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불태우다 순교한 세례 요한에 비유한 것이다.
주기철의 제자이며, 훗날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은 청주 형무소 수감 중에 아버지 손종일 장로로부터 주기철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1944년 5월 8일자 그의 편지에서는 주기철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나를 유독 사랑하시던 주기(柱基) 형님의 부음(訃音)을 듣는 나로서는 천지가 황혼하고 수족이 경전(驚顚)하나이다. 노모님과 아주머니께 조문과 위안을 간절히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병명은 무엇이며 별세는 자택인지요, 큰댁인지요, 알리워 주소서.
주기철의 순교에 도전을 받은 이들은 비단 위에서 언급한 이들만 아니었다. 채정민,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방계성, 오윤선, 이광록 등 수많은 이들이 믿음의 사람 주기철 목사의 순교에 도전을 받고 고난의 길에 동참했다. 투옥되지 않은 남은 자들은 고난의 짐을 함께 지며, 주의 고난에 동참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이후 산정현교회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가 폐쇄되고 담임목사가 순교한 가운데서도 교인들은 그 고난을 영광으로 받아들이며, 신앙의 순결과 절개를 지켜 나갔다. 비록 주기철 목사는 자신들의 곁을 떠났지만 주님이 친히 자신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와 방계성 장로가 투옥되고, 결국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이후 오정모 사모, 백인숙 전도사와 방계성 장로의 부인 박분옥은 자신들의 아픔을 뒤로하고 혼신을 다해 옥중 성도들의 가족을 돌보았다. 옥중 성도들의 뒷바라지는 물론 그들의 가정생활비까지 조달하면서 헌신적으로 섬겼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노회원들이 교회당을 강점하자 자진하여 예배당을 폐쇄하고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吳貞摸) 집사와 방계성 장로의 부인 박분옥(朴粉玉) 여사를 구심점으로 온 교인들이 일심으로 주를 섬기며 거룩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던 것이다.
(박용규, 평양산정현교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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