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聖山) 장기려
-- 출처는 "한국 디지털 도서관"의 "독서 감상문-아름다운 사람-장기려"입니다.
"聖山 장기려"(지강 유철저, 2007)를 읽고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우며 우리 곁을 살다간 성산 장기려 선생(1911-95)은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다.
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고 '거짓을 저주받을 짓'이라고 여겼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안 선생이셨다.
또 선생은 어떤 사람이든지 그 신분에 따라 다르게 대하지 않았고 두 개 가지면 벌 받을 줄 아는 분이셨고 길가는 거지들을 불러와 겸상 차려 먹이신 양반이셨다.
그리고 정부가 의료보험을 시작하기 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으며 평생 한국교회의 개혁을 열망으로 사신 분이셨다.
선생은 3가지 단어 '진실'과 '사랑', 그리고 '성실'의 공동체라면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 동의할 수 있었다. 예수가 이 땅에서 복음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선생은 삶을 회고하면서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여섯 사람을 택한다. 선택한 여섯사람 중 셋는 현실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 역사속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 땅에서 만났던 아내 김봉숙과 경성의전의 기용백 선배, 그리고 전종휘와 성서속의 요셉과 다윗,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소개한다.
그의 아내 김봉숙은 내과의사 김하식의 딸로 피아노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생각하다가 스물한 살에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고 선생의 월남으로 생이별 후 죽을 때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그의 삶의 미덕은 희생과 절대 순종의 삶이었다. '그 여자는 내 눈동자요, 내 손과 발이었다.'라고 표현했듯이 월남이후 어떠한 유혹(조국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미국으로 건너와 편하게 살자는 여성의 청혼)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었다.
선생의 신앙과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는 김교신이나 함석헌을 꼽는다. 삶의 후반부로 갈수록 영향을 받는 우치무라 간조나 김교신에게서 무교회적 영향을 받는다.
1940년 함석헌은 김교신의 집에서 만난 뒤 50여년 가까이 교제해오며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평생을 함께 해 온 신앙과 삶의 동지였다. 그의 성서연구는 처음부터 字句적인 외면적 해석보다도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고찰을 중시해 왔고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표현했으며 단순한 주관이 아니라 직관이자 생명이었다.
선생은 해방 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 나갔다. 이 교회는 일본 제정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 후 다시 문을 연 교회로 모름지기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믿음위에 굳게 서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올바른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가 시무한 교회이기도 했다.
선생은 좀 색다른 교회 개혁론자였다.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선생의 생애는 교회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들 보다는 교회 때문에 슬프고 아팠던 날들이 더 많았다.
부산으로 피난 온 후 복음의원을 개원하여 초대교회의 신앙생활 위에 기독공동체로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원장과 운전기사의 월급이 같았다.
부산사람들은 보통 복음병원에 간다고 말하지 않고 장박사한테 간다고 했다. 무엇이 이런 신뢰와 존경받는 의사로 만들었을까?
당시 간호사의 말을 빌리면 선생은 행려병자에게 찾아가 치료는 물론 손톱도 깎아주고 몸도 닦아 주었다고 한다.
성산 3훈이란;
첫째, 사랑의 동기 없이는 언동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여야 합니다.
셋째, 잘못된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믿고 해결하도록 합시다.
선생은 1988년 9월 4일에 다시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침례식이었고 감천 앞바다에서였다. 그의 일기에서,
"나는 옛날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물 뿌리는 세례도 받았는데 그건 성경에 없는 세례다. 다른 사람이 날 보고 뭐라 하든지 이 종들에게서 겸손하게 예수님께서 받았던 그 모습으로 다시 세례를 받았다".
'종들의 모임'은 복음을 전하고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이 원칙이었다. 예수님이 너희가 복음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부산 산정현교회에 종들의 모임인 로빈슨 선교사가 설교하기위해 강단에 섰다.
당시 부산 산정현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박목사는 로빈슨에게 설교하려면 가운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강단에 올라가지 않고 작은 강단에서 가운 벗고 하면 안 되겠느냐? 해서 문제가 해결되니 싶더니 담임목사가 어느 신학교를 나왔느냐고 묻기에, 사람에게 배워 선교사로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 종으로 부르실 때 가르쳐 준 것을 전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임목사 하는 말이
"우리 교회는 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이 아니면 강단에 세울 수 없다"
고 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실랑이 속에 약속대로 복음을 전하니 모든 교인들이 기립박수를 첬다. 그 교회는 예배시간에는 박수를 칠 수 없는 교회인데.
그런데 난처하게도 학생회장이 질문을 했다. 그 문제 중에 문제인 십일조였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을 때 선교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질문에 대해 말을 해야 하는지 안 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할까 아니면 피할까 고민한 것입니다. 침묵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감동은 성경말씀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다음 주부터 오지 말라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대로 하겠습니다. 시간관계때문에 다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제가 말하는 중간에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고 끊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성경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일 뿐 제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시대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할례도 받으시고 성전세도 내시다가 30세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십일조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이제 구약시대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성전개념에서 건물은 없어졌습니다. 때문에 사도행전 1장부터 십일조가 없고 이제부터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뿐입니다."
답변이 끝났지만 질문은 없었다. 담임목사는 "다음부터는 절대 모시고 올 수 없다"는 말을 선교사님에게 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성경에 어긋나는 말씀이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아니죠, 성경에 있는 대로 하셨죠. 그렇지만 신령한 축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과 영적 축복인데 로빈슨 선교사의 말대로 하면 영적으론 잘 될 런지 모르겠지만 물질적인 축복은 없습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축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라는 답변을 들었단다.
1988년 선생은,
"내가 이젠 진리를 찾았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산정현 교회를 떠났다. 교회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모두 4팀으로 나누어,
"할아버지,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세요?"
하면서 선생에게 매달렸다. 선생은,
"내가 가긴 어딜 가느냐? 집에 가서 자거라. 어디 안 간다. 너희가 진리를 찾으려면 날 찾아오면 된다"
라고 달랬다. 교인들이 한결같이,
"존경하는 장박사님, 어떻게 우릴 버리고 가십니까? 그만 돌아오세요!"
하자 선생은,
" '너희들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듯이, 여러분이 나를 존경한다하는데 존경하는 사람이 택한 길이면 따라와야지 존경한다면서 왜 안 따라옵니까? '너희가 존경했더라면 나를 따랐을 것이다.'이것이 예수님 말씀이 아닙니까?"
종들의 모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가 아니라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생활이었다. 이 모임은 신학교도 없이 지금도 이들은 160여 개국에 산재해 있다. 이들은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밥하고 세탁하고 청소한다.
가장 큰 축복은 무소유다.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선생이 한국교회를 보면서 가장 통탄하게 만든 것은 기독교의 자본주의화였다. 맘몬을 섬기는 기독교,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독교에 대해 크게 실망하며 거침없는 개혁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하늘을 찌를듯 하다는 고딕의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하다고 말했다.
선생은 십일조를 교회가 강요하는 것은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 교회 내에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부지기 수였던가.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학의 뼈대를 형성한 5C이후 성서적 근거보다는 신학적 근거를 중시하였고 제도교회는 교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교회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고 복음적이지 않은 것도 절대적 진리로 신자들에게 충성과 복종과 헌신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모두 맞는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선생은 우리 시대의 역사 속에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과 이념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역사의 산 증인으로 올 곧은 신앙인으로서 의사로서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다.
날마다 바울처럼 죽고 다시 산 사람, 십자가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 새 사람으로 거듭 난 사람, 이념과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 모두가 사람으로 보일 뿐 직위가 없었고 고하가 없었던 분이셨다.
하나님이 주신 인술을 그저 값도 없이 불쌍하고 가진 것 없는 분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가신 분이다. 이 분에게 무슨 상이 필요있으랴.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이다.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2008년 7월 11일 澗井 성신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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