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밭 늙은 호박
전국노래자랑을 시청하던 이모부가 기척이 없습니다.
송해씨의 농익은 재담을 계속 보기엔 기력이 딸립니다.
이모는 밭에 갔고 낡은 아날로그 TV 혼자 열창합니다.
낡은 액자에 담긴 가화만사성처럼 이모는 오래된 남편의
말기 간암을 묵묵히 간병하느라 몸도 땅도 묵정밭입니다.
아내와 나는 그 묵정밭에서 뒹구는 늙은 호박을 땄습니다.
작년엔 그 묵정밭에 뒹굴던 늙은 호박들이 그냥 썩었습니다.
호박죽을 좋아하는 아내는 내내 아쉬워하며 입맛 다시다가
올해는 썩히지 말고 챙겨오자 봄부터 벼르다 달려왔습니다.
가난한 삼화리 청년에게 시집와서 평생 농투사니로 살았던
이모는 삼성리에서 제일가는 땅 부잣집으로 일군 억척입니다.
자식들은 땅을 떠나도 묵정밭과 병든 남편을 지키는 이모는
팔순 언니와 조카가 오면 채마밭의 상추와 가지를 챙깁니다.
장모님은 농사꾼의 피땀을 공것으로 받아 가면 죄가 된다며
늙은 동생의 몸빼이 주머니에 옥신각신 지전을 찔러줍니다.
묵정밭 호박들을 승용차 트렁크 가득히 실고 도회지로 와서
아파트에 진열해 놓으니 휑한 베란다가 샛노란 들판입니다.
아내는 실고 온 묵정밭 호박들을 교회 권속들과 나누고도
한참 남은 늙은 호박을 손질해 호박씨는 베란다 뜰에 넙니다.
자른 호박은 스텐 냄비에 푹 삶고 불린 찹쌀을 믹서에 곱게
가는 동안 중불에 끓이던 호박이 익으면 믹서에 갈아줍니다.
아내는 호박죽을 좋아하고 저는 그 샛노란 빛깔을 좋아해서
팔 아픈 아내 대신해 호박죽이 타지 않도록 잘 저었습니다.
아내는 호박죽을 좋아하고 저는 제 인생 쓴맛을 단맛으로
바꿔주신 아내를 좋아해서 호박죽이 불에 눌어붙지 않게 잘
젖고 또 저으면 늙은 호박처럼 달착지근한 아내가 웃습니다.
남은 인생일랑 죽 쑤지 말자 기도하며 감사하며 죽을 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