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창/노동시편

빈집털이 소년

침묵보다묵상 2011. 8. 10. 16:25

빈집털이 소년

   

 

 

도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범인으로 지목한 담임선생은 소년의 결석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겼고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야 한다던 전도사는 소년이 교회에 나타날 때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드라이버 하나로 빈집을 터는 신기한 재주를 익힌 소년은 경비원의 눈을 피해 아파트 비상계단으로 생쥐처럼 숨어 들어가 빈집을 털곤 했다. 소년이 턴 집은 술주정뱅이 아비와 병든 어미의 어두컴컴한 영구 임대아파트보다 너무 밝고 행복했으므로 그 행복을 훔치고 싶었다.

 

소년의 책가방 아파트 지하 구석에 짱 박혔다. 어차피 반기지 않는 세상, 어차피 도둑놈으로 모는 학교, 더 이상 악수할 것도 배울 것도 없었으므로 아비에게 맞아 멍든 눈살 찌푸리던 소년은 빈집에서 턴 지폐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햇빛의 미행을 따돌리며 오락실로 잽싸게 숨어들었다.

 

소년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때까지 세상은 제법 관대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눈에 쌍심지를 켠 경비원에게 붙잡힌 소년은 개처럼 맞으며 파출소에 끌려가면서 드디어 소년은 빈집털이 범으로 주목받았지만 그의 가난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소년의 아비에게 지급된 생계보조비는 술값이었다. 쌀은 떨어져도 술병은 쌓여갔고 술주정뱅이 아비의 매질은 참을 수 있었으나 굶주림은 참을 수 없었다. 단전을 베고 잠든 어미가 소년을 기다리지 않던 그해 봄, 버짐 핀 소년은 빵을 훔치다 들켜 파출소에 연행됐고, 소년을 낯익어 하던 순경은 이 새끼 또 왔어!”라며 귓방망이를 후려쳤다. 빵집 주인은 미성년자를 처벌할 법이 없다는 설명에 구멍 뚫린 법이라고 탄식하면서 돌아갔고 빵을 얻는 것보다 훔치는 것이 더 쉬웠다고 진술한 소년은 뺨 몇 대 맞고는 훈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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