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창/눈물시편

눈 내린 날 섬진강 편지

침묵보다묵상 2011. 8. 4. 20:57

눈 내린 날 섬진강 편지

 

여기는 흐르는 강 눈 내리는 섬진강.

 

눈이 내려서야 사람의 소리가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하얀 백운산은 몹시 기쁜지 산수화 풍경으로 고요합니다. 눈은 소리를 삼키는 법, 서러운 소리도, 가슴 아픈 통증도, 아귀다툼의 발악도 삼켜서 마침내 고요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눈의 나라에 평민이 되고 싶습니다. 목이 뻣뻣한 고관대작은 추방된 나라, 높아질수록 몸을 숙이는 겸손의 나라에 살고 싶습니다. 사람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자본의 횡포, 노동의 땀을 집어삼키면서 생사여탈권을 쥔 자본이 빙판 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눈송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득한 빚더미, 날아오는 체납고지서·독촉장·가압류에 시달리다 농약을 든 손목을 정통에 맞히는 눈뭉치가 됐으면, 벼랑 끝 생명 끊으러 가는 길 넘어뜨리는 빙판이 됐으면, 죽음과 마주하려는 그네들에게 다가가 살다보면 옛말 할 날 온다!’ 호소하고 호통 치며 그네들 일으키는 눈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연탄도 석유도 가스도 끊긴 가난한 살림에 온기를 불어넣는 장작불이 됐으면, 집 나간 아비어미를 그리다 잠든 아이의 품이 됐으면, 공공근로도 끊기고 기초생활비 수급권에도 밀려난 식구의 고봉밥이 됐으면, 빚쟁이 드잡이 아수라판 살림에 망연자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빗어주는 얼레빗이 됐으면. 고통스런 이런 것들이 햇살에 눈 녹듯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해방의 공고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섬진강에 눈 내려서 길 끊긴 날, 끊어질 것들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것들만 끊겼지만 마음 고쳐먹었으면 좋겠습니다.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살아야 한다고 펑펑 쏟아 붓는 저 눈송이처럼 끊임없이 땅을 안고 살면 우리네 살림에도 봄 햇살의 따스한 날 온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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