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편지
밤이 되면 기침이 목젖과 가슴까지 후벼 파네. 뼈까지 아프게 하는 지독한 이 놈, 보름 넘도록 달라붙어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 놈. 그러므로 그 무엇이 됐든 등을 노리지 않는 것들은 쫓아 보내지 않기로 했네.
외상보다 내상이 치명적이라는 것, 그리 몸살 앓고 치유되었으면 좋으련만 편도가 붓다 못해 헐었네. 신열 앓던 혼곤한 밤, 혼미한 정신을 깨워보니 새벽녘이었네. 창문 열었더니 겨울 섬진강이 "쿨·럭·쿨·럭" 밭은 기침소리를 내며 가래 한 움큼 토했네.
감기는 치료약 없는 전염병이라지 아마. 사람 모이는 곳에 가지 말라는데 참 야박한 처방이네. 순정은 그리도 감염되지 않더니 눈 한번 마주친 적 없는 바이러스는 착 엥기네. 연정 없이도 살 잘 섞는 매춘의 지상에서 까짓 바이러스쯤이야, 통성명도 없이 함께 겨울을 나기로 했네.
겨울에도 꽃은 필까? 붉게 피어 혼절의 그리움으로 춤출 수 있을까? 남녘에서 더 남녘으로 달아났네. 해풍(海風)이 목젖 간질이는 겨울 바다에 닿았네. 횐 눈 그리운데 눈은 내리지 않고 횐 것이라고는 갈매기뿐이었네. 그 놈의 "끼·륵·끼·륵" 기침소리나 "쿨·럭·쿨·럭" 내 기침소리나.
겨울 오동도는 반란 중이었네. 시누대와 해안 절벽이 절묘한 숲 속에는 팽나무와 후박나무, 참식나무들이 해풍을 품고 뒹굴고 있었고, 가차운 발치 동백(冬柏) 숲에서는 붉은 무리들이 떼 지어 통정하고 있었던 거야.
"어머, 저 것 좀 봐, 저 것들…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 저 붉은 짓들 말이야…."
한 잎, 두 잎, 세 잎…. 셀 수 없는 동백(冬柏)의 쓰러짐. 포복한 채 구시렁구시렁 거리다가 이내 목청 돋우는 붉은 것들의 성토(聲討). 쓰러진 것들로 인해 일어선 땅에서, 붉은 강으로 흘렀던 반란의 남도에서 붉게 피지 않으면 그 무엇이 피어야 한단 말인가.
쓰러진 것들 곁에 누웠네. 동백의 가슴팍에는 샛노란 꽃술이 도드라졌네. 하이 참, 모가지가 떨어져도 저렇게 장렬하게 산화하고 말았으니, 백산(白山), 백산(白山), 인해백산(人海白山)으로 떼 지어 궐기했던 사내들의 순정이 오살 나도록 붉었을 것이네.
동백은 왜 남녘에서만 피는지, 그리움들은 왜 남녘으로 몰려와 반란을 일으키는지 알겠는가. 지지리도 못난 꽃들이 선도해야 붉은 깃발 휘날리는 봄이 오는 것을, 붉은 꽃들이 산산 골골 몰려다니며 위령제를 지내는 이유를 알겠는가. 그러므로 견딜 수 없이 춥고 외롭거든 봄 산천 올 때까지 동봉한 동백의 속살 잘 보듬고 지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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