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창/노동시편

입석(立席)

침묵보다묵상 2011. 8. 4. 20:37

입석(立席)

   

 

추운 밤을 버티기 위해선 꿈이 필요했다.

모포 한 장도 라면 한 냄비도 못되는 꿈

공장 기숙사 외풍에 떨면서도 꿈을 꿨다.

꿈보다 더 그리운 건 계집의 살이었다.

어떤 계집이 공돌이에게 아랫도리 내릴까.

납땜 연기에 코피 흘리고 쇳가루 마시며 번 돈으로

청량리에 갔더니 공돌이 괄시 않고 다 벗어주시더라

동대문 골목길 삼류극장에서 휴일을 땜질하면서도

꿈이나 갉아먹는 밀링공 선반공은 되지 말자.

용접 불빛에 아다리 돼 소주에 씻다가 징징 울지 말자.

때 묻은 작업복 벗어던지고 꿈을 죽이는 공장을 떠났다.

정체 모를 꿈의 휘몰이, 못 이룰 꿈의 속세를 등지자

용산 행 완행열차에 실려 가야산 해인사를 찾았다만

반야심경도 못 외운 채 행자노릇 때려치우고 하산했다.

어딘들 못 가랴 뱃놈이나 되자 돌산 임포, 그 광포의 바다에서

찢긴 꿈의 살점을 발라 회를 치고 소주에 취해 뱃놈들과 멱살잡이했다.

못 견딜 바다의 광폭한 바람에 쫓겨 임포 첫차에 실려서 다시 달아났다.

춥고 추운 잠자리 춥디추운 꿈의 추운 노래 추운 춤을 추면서

산으로 바다로 쏘다니다 프레스 공으로 가리봉 거리를 떠돈다.

철야 마친 새벽 소주에 세상 돌지라도 달아나지 않으리.

좌석도 내어주지 않는 입석의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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