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방/남자일기

[그 남자의 재혼일기 20] 딸에게 보낸 첫 편지

침묵보다묵상 2011. 8. 1. 19:44

[그 남자의 재혼일기 20] 딸에게 보낸 첫 편지

 

20051218

 

현진아, 너를 처음으로 만날 날이다. 그때의 기억을 추슬러보니 몇 가지 기억이 난다. 겨울 청계천에서 만났을 때 너는, 엄마의 남자 친구인 나를 별로 곱지 않게 바라봤고 나는 너와 친해지려고 없는 말 있는 말 꺼내다보니 매력 없는 수다쟁이로 평가됐던 것 같다. 한마디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던 거지.

 

2006819

 

이날 엄마 아빠의 결혼식과 함께 우린 한 식구가 됐지. 이혼이란 상처, 부모들의 문제로 인해 상처 받은 현진이와 승아, 솔이가 한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큰 사건이었을 거야. 특히 현진이 너에겐 엄마를 잃은 상실감이 있었던 것도 기억한단다. 그러나 고맙게도 너는 이해하려고 애썼고 승아, 솔이와도 무던하게 지내준 것이 참 고맙다.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벌써 4년에 이르고 있구나.

 

현진아, 너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쓴다. 어색하고 곤혹스럽다. 첫 편지가 따듯한 사연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엄마 아빠 관계는 결혼 4년여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엄마는 아빠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단다. 전적으로 아빠의 잘못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란다.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니 그럴 수도 없구나. 일단은 가해자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진이 너에게 용서를 구한 뒤에 엄마에게도 용서를 구할 생각이란다.

 

아빠는 올 여름방학을 '현진이와 친해지는 기간'으로 잡았단다. 아빠는 그동안 너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도 아빠도 가엾은 영혼인데, 얼마나 헛되게 믿었으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이렇게 무시했던 걸까? 하고 뉘우쳤단다. 그러한 잘못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단다. 한순간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한걸음씩 다가가다 보면 틀림없이 너도 아빠에게 다가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네 안의 상처와 아빠 안의 상처가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상상했단다.

 

아빠는 상처로 얼룩진 사람이란다. 옹졸함과 편견, 자기만의 잣대에 사로잡힌 병든 사람이란다. 그래서 친아빠에게 상처를 받은 가엾은 너를 품에 안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빠만의 잣대와 편견으로 너를 재단했고, 그 잣대에서 벗어나면 너에 대한 편견의 벽은 더 두꺼워진 것도 사실이란다. 그래서 너는 아빠가 주로 관리하는 집을 불편해 했을 것 같다. 정말 미안하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찾아오는 너에게 안식을 취하게 하기는커녕 부담감과 그 어떤 고통마저 주었으니 아빠라는 이름이 아니라 가해자라 불려야 마땅할 것 같다.

 

아빠에겐 강박관념이 있다. 첫 번째 결혼 실패로 인해 생모에게 상처 받고 버림받은 승아, 솔이를 지켜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이 매우 컸다. 아빠를 잘못 만나 겪은 고통의 일부분이라도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이 아빠를 버티게 한 측면이 있단다. 특히, 여섯 살 어린 나이로 생모에게 버림 받은 솔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곤 했단다. 성격이 여린 솔이가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솔이를 유독 챙겼단다. 그런 아빠의 행동은 과도했던 것 같고, 그로 인해 현진이와 승아가 상대적 박탈감을 받았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사랑은 여럿이 함께 나누는 것인데 아빠는 그러지 못한 채 편애로서 너희들에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다.

 

아빠는 엄마로 인해 행복했다. 다시는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정과 가족에 몰두했다. 행복한 가정을 일구었으니 이 가정을 지키는 게 최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아빠의 생각은 엄마와 현진이에겐 동의되지 않은 일방통행의 것이란 것을 알았다. 인생의 80% 가량을 걸었던 가정이 아빠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되고, 아빠는 가해자의 위치에 있고 엄마와 현진이는 피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정신적 공황마저 일어나고 있다. 인생의 많은 것을 쏟았고, 그게 맞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면서 영혼이 흔들리고 심지어 무너지는 소리까지 들린다. 잠도 잘 수가 없고, 판단력은 흐려지는 듯하다. 심지어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란다.

 

배우가 배역을 잘했다고 믿었는데 오히려 연극을 망친 꼴이다. 연출자와 관객이 칭찬은 아니더라도 옹호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비난과 저주가 쏟아지니 못 견딜 것 같은 상황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좋은가? 망친 배역에 대해 어떻게 책임져야 좋은가? 남편과 아빠라는 배역을 내려놓고 무대에서 사라지는 게 옳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현진이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 말 몇 마디의 용서로 그 상처가 다 낫진 않겠지만 살아가면서 그 부채를 갚고 싶다. 무엇보다 아빠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우리 가정을 지키고 싶고, 비바람을 견디고 잘 자란 소나무처럼 평온하고 푸르른 가정을 세운 뒤에 하늘나라로 떠나고 싶은 게 인생의 간절한 바람이란다.

 

현진아!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해줄 순 없겠니?

비록 문제가 벌어졌으나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순 없겠니?

 

사랑하는 현진아!

너와 나의 상처를 서로 어루만져 주면서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내인 엄마의 상처 난 마음이 속히 회복되면 좋겠다. 그래서 남은 날들을 아빠와 정을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엄마의 발을 주물러주는 것도 계속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니가 결혼하는 그날, 서로 사랑하는 아빠와 딸로 결혼식장을 함께 걸어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여러 가지를 바라고 구하면서 곤혹스럽고 괴로운 편지를 마쳐야하겠다. 현진아 만나서 이야기 하자. 하나님께서 땅에서 매인 것을 풀라고 하셨으니 그리하도록 하자.

 

7월 첫째 날,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