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방/남자일기

[그 남자의 재혼일기 19] 나는 주소불명의 세대주였다!

침묵보다묵상 2011. 8. 1. 19:10

[그 남자의 재혼일기 19] 나는 주소불명의 세대주였다!

 

새라면 아아, 쫓겨나지 않는 새라면

해거름 속으로 평화롭게 귀가하는

새처럼 아, 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꽃이라면 아, 질긴 목숨의 꽃이라면

사방 천지 들녘에 억세게 뿌리 내린

들꽃처럼 아, 피어날 수 가난 때문에

문패도 번지도 없는 주소불명의 세대주여

강제집행 통지서 받아든 불법 거주자여

이 지상에 둔 어린 새끼들과 누울 자리

지고 갈 수도 없는 집 한 칸이 없어서

잠든 새끼들의 머리맡에서 시로 우는 아비여

 

(졸시 '이 지상의 집 한 칸' 전부)

 

순순히 인도될 자가 아니었습니다. 강퍅함과 교만이 얼마나 심했는지요. 저를 전도하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을 자가 도저히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되돌아갔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더군요. 낭떠러지 교통사고로 죽음에서 살아나고, 한 여자에게 두 번 이혼 당하고, 집도 절도 없는 빚쟁이로 몰리고. 주의 사랑을 거절하고 버틴 대가로 맞고 또 맞으며 벼랑 끝에 내몰리고서야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영접'이 아니라 '매달림'이었습니다. 심장을 조여 오는 통증과 두려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절규였고, 찬양이 아니라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예배당에만 앉아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콧물이 쏟아졌습니다. 반항은커녕 옴짝달싹할 기운조차 없고서야 성령님이 임재 하셨습니다. 병들고 상한 영육을 만져주신 그 구원의 손길로 인해 저의 생명은 건져졌습니다.

 

그렇게 악령에게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아홉 살, 여섯 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11평의 영구임대아파트에 불법 거주하는 주소불명의 세대주가 됐습니다. 어린 아들의 머리맡에서 울기도 했습니다. 이 아파트에선 1년가량 거주했는데 관리사무소의 명도소송에 의해 부득불 쫓겨나야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 오늘도 우리의 죄를 위해 외롭게 떠돌아야만 주님!

 

아파트 털이범 소년과 맹인 노부부

 

그 임대아파트에선 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싸움 소리와 술주정 소리, 소주병이 투척되어 깨지는 소리와 저주 섞인 욕설과 문이 세게 닫힌 뒤에 달아나는 소리. 그 아파트에서 열 살짜리 소년과 맹인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학교 가는 날보다 오락실에 가는 날이 더 많은 소년의 얼굴에선 시퍼렇게 멍든 자욱이 지워지지 않았고, 퀭한 눈빛에선 면도칼 같은 살벌함이 비춰졌습니다. 큰아들 또래인 소년의 사연이 궁금해서 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에게 물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는 무기력증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정부에서 매달 지원되는 생활지원금은 소년의 아버지의 술값으로 쓰인다는 것, 어느 날 가정방문을 했더니 소년의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전기 스위치를 올렸으나 전등이 켜지지 않았다는 것, 남편이 생활지원금을 수령하는 족족 술값으로 탕진하는 바람에 전기세가 체납되면서 단전조치가 내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돈이 떨어져 술을 먹을 수 없게 되면 소년과 아내를 때린다고 했습니다. 학대에 시달리던 소년은 가출을 일삼았고, 드라이버 하나만 있으면 순식간에 아파트 창문과 현관문을 따는 기술을 배우고 왔다는 것입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처럼 소년의 잦은 절도 행각은 아파트 경비원에 의해 들통 났습니다. 소년은 경찰에 넘겨졌지만 14세 미만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에 해당돼 풀려났고, 그 이후에도 그의 절도행각이 지속되면서 잡혔다가 풀려나고, 풀려나면서 몇 대 얻어맞는 일이 반복됐다는 것입니다.

 

누구랄 것이 있을까요? 저 또한 소년의 아버지처럼 악령에 사로잡혀 술주정 하면서 살진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요? 제가 그렇게 되었다면 아들들 또한 그 소년처럼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아파트에서 무사할 수 있도록 지켜주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새벽에도 밤에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시도 때도 없이 교회와 기도실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헤쳐 나갈 길이 열리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말씀은 명명백백하게 사실이었습니다.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는 그 사회복지사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회사 업무로 퇴근이 늦어지면 수녀 출신인 그분에게 작은아들을 부탁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제게 부탁을 해왔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맹인 할아버지를 복지관 목욕탕에 모시고 와서 씻겨드린 뒤 다시 댁까지 모셔다드리던 자원봉사자가 있었는데 그 분이 갑작스런 사정으로 중단하게 됐다며 그 봉사를 대신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럴만한 사정이 되나? 그런 봉사를 할 자격이 있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만신창이가 된 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99년 봄에 공홍근(68) 황혜옥(63) 부부를 만났습니다. 마흔 무렵에 앓은 녹내장으로 실명하게 된 공 어르신은 실명의 아픔보다 아내와 딸에게 버림받은 고통이 더 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세상을 따로 살다가 지금의 천사 같은 아내와 온유한 남편을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사 궂다 좋다 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섬기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사시는 노부부를 모시러 가는 날은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봄 해풍과 봄꽃이 완연한 항구의 금요일이었습니다. 점자 성경을 읽던 공 어르신은 몇 차례 목욕봉사로 익숙해진 저를 반겨 맞아주셨고, 외출 채비를 끝낸 노부부는 손을 맞잡고는 목욕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저는 육신의 때를 밀어드렸고 어르신은 상한 제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세상 풍파 거세도 살다보면 잔잔한 날이 온다면서 "조 선생, 아이들을 잘 키우다 보면 축복 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어르신을 종종 찾아뵙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친손자가 온 것처럼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서 참 좋아하셨습니다. 2000년 설 명절에 세배 드리러 찾아뵈었는데 두 분의 건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새벽예배 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넘어진 뒤로 허리 통증에 시달리셨고, 깊어진 병세로 목소리마저 쇠해진 할아버지는 "이 땅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살아봐야 한 23년을 더 살지, 그것도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 육신이 자꾸 약해지는 것 같아요."라며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날이 할아버지와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항구도시를 떠나면서 더 이상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21028일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데 항상 쾌활하던 목소리가 아닌 매우 침울한 목소리였습니다. 여드레 전인 1020일에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며, 장례를 마치고 나서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저에게 소식을 빠트린 것이 미안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울음이 울컥거렸습니다. 그리운 하늘 아버지 품에 안기셨을 것이 확실하므로 슬퍼할 일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의 외로움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럼에도 눈물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외롭지 않다는 믿음의 말씀, 하나님이 할머니를 유독 지켜주실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햇살 따스한 뜰의 재산세 166,320

 

영등포, 신정동, 여수, 묵동, 정릉동, 안양, 안산, 광양, 서울, 사직동 그리고 충정로.

 

유목민도 떠돌이별도 아닌데도 정주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엔 보헤미안처럼 살려고 했습니다. 박인환의 시를 외우면서 술병을 쓰러뜨리며 세월을 낭비했습니다. 삶의 뿌리가 취약했던 불안한 영혼은 육신의 방황에 덩달아 춤을 추었고, 떠도는 영육으로 인해 주거는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그렇게 40년 넘도록 남부여대하고 부랑초로 살던 제가 정착민이 됐습니다.

 

지금 거주하는 충정로 아파트를 '햇살 따스한 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남향인 이 아파트 1602호엔 단지 햇살만 비춰질까요? , 눈빛, 이불, , 세탁기, 식탁, 아내, 아이들 등 모두가 따스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지요. 어둠을 이기려 하지 말고 빛에 속하라는 말씀에 천 번 만 번 순종하렵니다. 저와 동거 동락했던 분노, 증오, 아집, 편견, 다툼, 위축, 소심, 외로움, 슬픔 등을 이 따스한 햇살을 쪼이게 합니다.

 

햇볕 정책입니다. 그들은 내 쫓으려고 하면 더 엉겨 붙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구슬려야 합니다. 나도 힘들었지만 너흰 더 힘들었을 거야! 미안하지만, 우리 더 이상 힘들지 말자! 우리가 입었던 축축하고 어둡던 옷을 벗도록 하자! 평안하게 아주 평안하게 햇살을 쬐면서 새 옷을 입도록 하자! 금빛 은빛 뭐 이런 옷 말고 아주 소박한 옷을 입자! 그 옷을 입고서 기도와 묵상에 잠기자! 오래 참는 것에 대해, 오래 사랑하는 것에 대해, 오래 나누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그렇게 아무 것도 원치 않는 자로 낮은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땀 흘리자!

 

세상에서 공짜는 없습니다. 햇살 쬐는 값을 내라는 고지서가 서울시로부터 날아들었습니다. 올해 재산세(주택)166,320원이 부과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택소유자가 제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고지서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20068월 결혼하면서 아내가 제 이름으로 아파트를 산 것입니다. 염치없는 노릇입니다. 이 아파트를 사는 데 어떤 기여도 하지 않은 제가 어떻게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고 갈 수도 없는 집 한 칸이 없어서/ 잠든 새끼들의 머리맡에서 시로 우는 아비"에 불과했던 제가 아내로 인해 졸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집 한 칸 마련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은 수고라도 하였지만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런 제가 영원한 하늘의 집에 들어서는 구원 사역에 근면 성실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나의 집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아내도 나의 아내가 아니요. 나의 자식도 나의 자식이 아니요. 나의 시도 노래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생명도 나의 생명이 아니요. 오직 구원의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길 원하니 주 예수의 보혈이 나의 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부끄러운 고백이 결코 미사여구가 되지 않도록, 햇살 바래지지 않도록 소박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