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방/여자일기

[스크랩] [그 여자의 재혼일기17] 시댁, 시어머니, 시집 식구

침묵보다묵상 2011. 8. 1. 17:36

 

 

 

남편은 불우한 가족사를 지녔습니다. 저 역시 불운한 시대를 사느라 넉넉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과거는 온통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어떻게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무서운 일들뿐이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북에서 넘어오신 아버지는 길거리 노점상을 하시며 늘 고향을 그리워하시다 행려병자로 돌아가셨고,

가난에 시달리던 나이어린 시어머니는 삼형제를 두고 집을 나가, 형은 소년원에 들어갔고,

남편은 열 살때부터 어린 동생을 돌보며 살림을 했다고 합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는 삼형제를 당신이 장사하고 있던 항구도시로 불러 함께 생활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 형님(시아주버니)은 '어머니가 자식을 버려 이렇게 됐다'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여전히 지니며, 지금까지 상처를 씻어내지 못하고 계십니다.

 

같이 산다고 모두 가족이겠습니까?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할퀴며 사는 가족들, 더욱이 남편의 결혼 실패는 저보다 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했고, 배우지도 못했고, 삶은 바닥에서 늘 실패를 맛보며 살아야 했던 남편은 뒤집힐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고통을 글로 풀어냈습니다.

 

남편은 실패와 좌절의 아픔 탓인지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저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가족을 아무도 부르지 않겠다고 했고, 앞으로도 가족과는 관계없이 단절하고 살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엄마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어머니를 뵈러 여수에 갔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자지간의 대화는 서먹했고, 시동생과의 만남도 그리 편편치 못했습니다. 남편이 원치 않아 형님은 만나보지도 못했지요.

 

결혼식 날 서울에 올라오신 어머님께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고 했을 때,

"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하기만 한데, 그래도 되냐?”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결혼식을 마친 그 달로부터 어머니께 친정엄마와 같은 액수의 용돈을 남편의 이름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리고 집안에 일이 있을 때면 그래도 형편이 제일 나은 내가 먼저 부담하고자 애썼습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셨고, 시동생은 ‘고마워요, 형수.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지요?’ 했습니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남편과 가족들은 매우 가까워 졌습니다. 이제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고, 서로의 상처를 덮어주려 하며,

마음이 오가는 따뜻한 전화를 주고받습니다. 

특히 시골로 집을 옮기신 어머니를 간간히 찾아뵙고는 집안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 함께 의논합니다.

 

어머니는 두가지 기쁨이 생겼는데, 하나는 '신앙생활'이고, 하나는 '시골생활'을 하면서 모처럼 평안한 노후생활을 즐기시는 것입니다.

여수에서 시아주버니와 살때도 성당에 다니시긴 했는데, 쉬엄쉬엄 다니시는 정도였습니다.

 

시골에 성당이 없기에, 이사후 찾아뵌 우리 부부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까운 교회에 가서 목사님께 인사를 드린 후 어머니를 부탁드렸습니다.

큰 글씨 성경과 알람시계도 사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구역예배도 드리고, 새벽기도도 다니십니다. 이렇게 좋을 걸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아쉽다고 하십니다.

이제 자식들을 위해 새벽기도를 드리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기도로 우리가 삽니다.

출처 : 그남자 그여자의 재혼일기
글쓴이 : 햇살 따스한 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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