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창/그들시편

고정희 시인의 야훼님전 상서

침묵보다묵상 2011. 8. 24. 06:38

야훼님전 상서 

고정희

야훼님!
한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추위와 각고를 끝낸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주 멀리 멀리 떠날 줄 알았던 그,
이제는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섬광같은 눈빛을 간직한 채
그의 기원을 묻어둔 집으러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영원히 닫힌 줄 알았던 우리들
기도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영원히 끝난 줄 알았던 자유의 휘파람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우리들 기다림이
불기둥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훼님!
그가 돌아온 마을과 지붕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가 돌아온 교회당과 십자가는 더더욱 고독합니다.
그가 돌아온 들판과 전답은
이 무지막지한 어둠과 추위 속에 누워 있습니다.
우리가 저 대지의 주인일 수 있을 때까지
재림하지 마소서.

그리고 용서하소서.
신도보다 잘 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
사회보다 잘 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
제자보다 잘 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
독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
백성보다 살쪄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