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꾸는 인물 1
2007년 12월 2일
“청빈의 삶” 앗시스의 성 프란시스코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seoulch@gmail.com)
사람은 하늘로부터 삶을 부여 받았다. 그 삶은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있기에 생명이 있다. 참으로 그 삶은 위대하다. 그 삶이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을 아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발견하는 일로 출발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말했듯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고 했고 철인 세네카는 ‘어떻게 사는 가를 배우는 데는 전 생애를 요 한다’고 한다. 수많은 과거를 사는 사람 중에 시간을 초월하여 한 번의 삶으로 영원한 삶을 살아 우리의 삶에 공감을 주고 그 삶의 철학은 오늘 우리의 삶에 전환점을 마련하게 한 삶을 가꾸는 인물들이 있다. 그 ‘삶을 가꾸는 인물’들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청빈(淸貧)의 삶” 앗시스의 성(聖) 프란체스코 (1182-1226)
프란체스코라고 알려진 지오반니 베르나르도네(Giovanni Bernardone)는 1182년 중앙 이탈리아의 한 소읍, 곧 아시아의 한 소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으로 그의 아들을 큰 장사치로 만들려고 상업을 하려 하였다. 그 어느 하루 이른 봄 잔디가 파랗게 돋아나는 날에 프란시스코 청년은 아시스 성 밑에 앉아 태양의 볕 쬠을 하려는데 거기 누더기를 입은 거지가 앉아 이를 잡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불쌍한 마음에서 자기의 비단 옷을 벗어 그 거지에게 입히고 자기는 거지 입던 옷을 바꿔 입고 집에 돌아왔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너무 노해서 호되게 꾸지람했으나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기대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 한 분입니다’고 하고 그는 아시시 성 밑에 와서 숱한 거지들을 모아놓고 거지 대장이 되었다. ‘여기 우리는 거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고 선언 하였다. 이는 1209년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마태10;9)한 성서의 말씀에서 크게 감명을 받고 그는 전적으로 사도적인 청빈생활에 자신을 내어 맡기기로 결심하게 된다. 누더기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니면서 복음서의 교훈대로 지팡이나 전대를 가지지 않은 채 회개를 외치기 시작한다.
얼마 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 일을 위해 바친 한 유명한 동향인 베르나르도와 합류하게 되었고 1년 안에 11명이나 되는 다른 동료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삶은 지극히 금욕적인 생활이었다. 그 생활은 성서의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 생활을 따르는 무소유와 절대적 사랑의 봉사였다. 14세기 초 [성(聖)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이란 사화집(詞華集)에 이탈리어로서 성 프란시스코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며 전54장의 단편들이 들어 있다. 여기에 그의 한없는 경건성과 성시(聖詩)를 알아볼 수 있다. 그는 탁발의 가난한 생활을 하며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단벌옷에 새끼로 띠를 띠고 복음의 기쁨과 평화를 설교하는 생활이었다.
그의 설교는 인간만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화집 16장에는 “새들에게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성 프란시스코가 설교를 할 때 새들은 입부리를 벌리고 고개를 늘어뜨리고서 날개를 벌린 채 공손한 몸짓으로 기쁨을 나타냈다고 한다. 즉 ‘나의 자매 새들이여, 너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한없는 은총을 입고 있다. 너희는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주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라. 하나님은 너희들의 희망대로 어디나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샘과 물을 너희의 마실 것으로 주신다. 하나님은 너희에게 산과 골짜기를 집으로 주시고 하나님은 너희의 어린것에게 옷을 입혀 주신다.
그러므로 나의 자매여, 하나님께 마음으로 감사의 은혜를 져 버리지 말고 항상 주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라.’는 새들과의 대화를 엿볼 수 있다. 사화집 19장에는 프란체스코의 눈병과 그 병을 통하여 아프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과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산다미아노 수도원의 담 벽에 에워싸인 좁은 안마당에서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의 가사를 쓴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새로 나온 한국 찬송가 69장의 가사가 있게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 찬송은 기쁨에 넘치는 찬송이다. 그의 설교와 생활에 감명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마침내 독자적인 탁발수도회를 형성하게 되었고 1223년에 “작은 형제단”(Ordo Fratres Minores)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명상과 기도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존중하고 청빈(淸貧)과 정결 및 복종의 서약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모임이었다. 이러한 형제단의 활동은 병자와 빈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헌신적인 봉사, 사제들과 형제단의 진지한 설교, 그리고 이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선교 등으로 이루어졌다. 프란체스코의 생애의 마지막 15년에 대한 연대기적이고 역사적인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 하지만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세 가지 중요한 일이 있다. 하나는 그들은 페루지아, 크로토나, 피사, 피렌체 등지에 최초로 형제단의 수도원을 마련한 점이다.
또 하나는 그들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최초의 선교를 시도하여 다섯명의 형제들을 모로케오에 보내었으나 이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처음으로 스페인 반도와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차츰 나이 들어가면서 영양부족으로 병이 나면 ‘오 사랑하는 형제, 병이여’하고 병을 포옹한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활동에 대한 찬양 등에 사용하였다. 그의 <피조물들의 찬양>으로 알려진 찬송가는 태양형제, 달과 별 자매, 바람 형제, 물 자매, 불 형제, 마지막으로 죽음 자매들에게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어린아이같이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그는 짧은 여생을 수도원 설립자처럼 은둔의 말년을 보낸다.
프란체스코에게는 젊어서 사랑하던 클라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역시 클라라 자매는 프란시스코 승단 저쪽 언덕 너머에 자매 단을 만들어 여자수도승단의 원장으로 평생을 지냈다. 프란체스코가 한번은 그곳에 방문을 했다. 둘이는 옛 정이 새로웠다. 클라라는 반갑게 정성껏 대접하였다. 프란체스코 자신도 깊은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정을 이기기 위하여 대접받는 밥과 반찬에 재를 흠뻑 뿌리고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는 그가 죽은 다음에 굉장한 승단 종파가 될 줄은 몰랐었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랑을 나눠먹고 살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는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로 인해 건강을 해쳐 44세의 나이로 그에게 주어진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법왕청에서는 프란체스콘이라는 거대한 종파를 수립해서 베네딕트 교단과 대립시켰다. 지금도 프란시스코 종단은 전 세계에 건재함을 알게 한다. 프란체스코가 생겨난 첫 한 세기 동안에 세 명의 위대한 스콜라철학자, 곧 알렉산더,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등과 아울러 훌륭한 의사인 로저 베이컨, 그리고 유명한 신비주의자요 대중 설교자인 다비트((David of Augsburg)와 베르톨두스 등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중세 후기의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성서 주석가인 니콜라우스, 설교가인 베르나르두스와 요안네스, 몰라르, 그리고 유명한 교회법학자들인 아스테사누스, 알바루스, 펠라기우스, 후에는 바딩과 파지와 같은 건전한 역사 연구가들이 있었으며 중세 후기의 기독교예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아시시 수도원교회에 사용된 이탈리아의 고딕양식은 주로 프란체스코회의 인물들, 또는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19세기 말엽에 레오13세가 1882년9월17일에 프란체스코 명의로 작성한 제3수도회의 규칙을 따르며 제3수도회를 칭찬하면서 근대적인 상황에 그 정신을 유익하도록 수용한 점도 유의하는 것이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프란체스코회원은 카나다의 성 요셉관구의 드콰이어와 벨레로즈 수사이다. 1938년 12월 15일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한국관구의 수도원의 활동은 해방과 6,25의 영향으로 특수사목 영역으로 전국에서 성 프란시스코의 생활신앙을 계승하여 성빈(聖貧)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청빈의 삶을 살도록 하게 하였다.
만우 송창근 목사와 장공 김재준 목사가 아시시의 성 프란시시코의 청빈의 영향을 받아 그와 가까운 삶을 살기 위하여 “선린(善隣) 형제단”을 구상하여 시행하고 “향린동산”을 만들어 사랑을 나눠먹고 살자는 의미를 지니는 배경이 된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삶의 철학은 오늘 우리의 삶에 전환점을 마련하게 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성 프란시스코의 “작은 형제단”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인 것이다.
아아 주여! 나로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비추게 하소서.
아아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이해되기보다는 이해하기를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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