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위하여/프란치스코

[스크랩] 온유와 겸손으로 우애의 대안적인 세상을 꿈꾸던 신의 어릿광대 - 아씨시의 프란체스꼬

침묵보다묵상 2011. 7. 31. 09:02

온유와 겸손으로 우애의 대안적인 세상을 꿈꾸던 신의 어릿광대 아씨시의 프란체스꼬
 

,                                

 

 


21세기 초엽에 서 있는 우리의 세계는 폭력과 탐욕이라는 광풍이 지구적인 현상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적 문제로는 과대한 소비주의와 정감없는 합리주의로 인한 환경위기, 사회적인 빈부격차의 심각한 균열과 삶의 부정적 요소들에 의한 내적 갈등과 혼란 등이 존재한다.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성인인 아씨시의 프란체스코(1182-1226)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그는 가난한 자와 작은 자와의 연대, 온유와 겸손에 근거하며 선을 통한 타인의 해방, 사회적 약자와 자연만물의 우주적인 우정 공동체를 지향함으로서 대안적인 미래 사회를 위한 중요한 통찰과 비전들을 제공한다.  박성용 박사/비폭력 평화물결 대표



고통이 감미로움으로

“하느님은 나, 프란치스꼬 수사에게 속죄로 아래와 같은 것을 하게 하셨다. 내가 아직 죄 중에 있을 때에 문둥병자를 보는 것이 아주 고역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주님이 스스로 나를 그들에게 보내어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질 때에는 내게 고역이던 것이 정신과 육신의 감미로움으로 바뀌었다. 그후 나는 얼마동안 머뭇거리다가 세속을 떠났다.”

위의 인용은 프란체스코의 자서전적인 유언으로서 그의 삶을 간결하게 꿰뚫는 본질을 표현한다. 그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현대인에게 이상하고도 낯선 것이 된 ‘속죄’의 실천이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한 보속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와 지금에 있어서도 낯설은 경험이자 우리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운 장벽이기도 하다.

당시는 봉건귀족이 몰락하기 시작하고 상인들이 하나의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출현하여 부르조아 계급의 막 탄생하던 시기로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회심을 통해 그 반대의 길인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로 삶의 의미를 바꾸게 된다. 또한 기독교는 당시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통치하에서 비로소 황제보다 더 우위에 속한 세계통치권자로 등극하게 되고, 세계지배를 위한 십자군전쟁을 일으키는 최고의 제국적 교회이자 봉건제후의 교회로 서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란체스코는 콘스탄티누스가 물려준 제국의 영광과 약속의 상속자인 성직자 교회가 아니라, 중심이 아닌 주변(the margin)에서, 보잘것없는 자들(minores)을 위한 바보스런 생활, 즉 철저하게 가난하면서 단순하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로 회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드러우면서도 조용하게 기존의 중세교회를 뒤흔드는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정도의 다른 흐름의 씨앗을 심어주었고 그 열매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영감과 활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코의 보속에 대한 헌신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삶을 제대로 알기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다. 그는 아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서 명성에 대한 꿈과 기사도에 대한 열망, 상인아들로서의 방탕생활의 지난 25년의 청년시절을 망쳐버린 세월로 이해하였고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가 근교에서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난 문둥병자와의 대면사건에서였다. 그 이전부터 그는 문둥병자를 보면 구역질과 혐오감이 들어 피해가곤 했었다. 그런데 이 만남에서 돌아서 비켜가려고 하다가 동정심이 일어나 병자에게 지갑을 주고자 싫은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다가가다 갑자기 문둥병환자를 껴안고 열렬히 입맞추게 되었다.

이 초인간적인 자기극복의 경험을 통해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문둥병자 병원에 찾아가 곪은 상처를 씻어주고 그들의 손과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 후부터 그는 문둥병자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형제들>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신을 보는 인식론적 전환을 얻게 된다. 자기 부정을 통해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모를 겪은 것이다. 그는 말한다. “헤어질 때는 나에게 역겹던 것이 정신과 육체의 감미로움으로 바뀌었다.” 이 말처럼 일생동안 가난과 비천함, 주변의 몰이해와 경시라는 역겨움이 감미로움이라는 명랑성과 환희로 바뀌는 신비스런 영혼의 변모가 이루어지게 된다.


벌거벗은 자로서의 자유체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이 거지는 비범한 현시에 대단히 감동되었으며,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교회를 지어라. 너는 내 교회가 아주 허물어진 것이 보이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씨시 주변에서 가장 허름한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들려진 그리스도의 음성을 통해 그는 신적 사랑에 눈뜨게 된다. 그때부터 그리스도가 그의 생활에 들어오면서 그의 삶은 변모해 갔다. 기독교에서 교리화와 지성화로 인해 거의 망각된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에게 살아나면서 포목장사에 등한히 하고 성당을 보수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된다.  
결국은 아씨시의 주교관에서 부자지간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있는 데서 옷 하나 걸치지 않는 벌거숭이라는 기상천외의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벌거벗음은 소유와 도시문화와의 절연 그리고 신에 대한 진지한 인간으로서의 철저한 지향에 대한 상징적 행위가 되었다. 이제 그의 신에게로의 길은 청빈의 삶이된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문둥병자를 주의 표징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변인’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가난 추구는 여성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어 <가난부인>과 혼인을 하여, 열렬한 사랑으로 가난을 포용하고 가난의 충실한 남편이 되고자 하였다. 그는 이 혼인을 통해 새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즉 온갖 소유의 부담에서 해방된 자유와 희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가난이 신음의 쓰라림이 아닌 풍요와 기쁨이 되어 그의 일생을 채운다.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새로운 백성의 탄생

“주교님, 우리에게 재산이 있다면 그것을 보호하기위하여 무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재산 때문에 소송과 분규가 생기며, 그것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여러모로 훼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재산을 소유할 생각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소유와의 단절 그리고 가난한 자와 작은 자를 향한 철저한 지향은 당연히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고 그는 <어릿광대>로서 정신 나간 사람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삶의 방식은 사람들을 감염시켜서 여러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맺고 추종자가 불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수도원들은 영주와 결탁하거나 많은 땅을 소유하고 농토세를 받는 봉건제도의 중심에 있었던 반면, 그의 공동체로의 입회는 재산을 처분하여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하는 조건을 붙이고 노동과 탁발에 의존해서 사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성직자나 수도자의 인간적인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오직 신의 지시에 귀를 기울였으며 1209년 성당에서 사제가 읽은 예수의 열두제자 파견이야기에서 무소유 원칙(마10:7이하,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직 다니지 말고...)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문자 그대로의 실천을 하게 된다. 예수의 본받음이 이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따라 타협없이 생활하는 거룩한 실천을 감행한다.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마25:40)의 복음서의 속삭임으로부터 그는 ‘‘작은 형제회’(freres mineurs)’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수도회는 겸손에 대한 철저한 수행을 통해 권력의식에 대한 일체의 거부, 종교적 공산주의를 능가하는 철저한 무소유로서 ‘순례중인 존재’로서의 자아에 대한 각성, 소유와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기존 경제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서 탁발과 노동의 실천 등으로 이태리 전반을 열정으로 몰아넣었다.

이 공동체는 수도회라기보다는 형제의 모임으로 스스로를 생각했으며 따라서 기존의 폐쇄된 명상중심의 수도회와는 달리 ‘세상 안에서의 수도생활’ 곧 세상으로부터 물러서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작은 자에 대한 섬김>과 <세상의 성화>라는 새로운 이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적인 평화애>를 강하게 주장하여서 언제나 ‘주의 평화가 당신에게’라는 말로 말을 걸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화해를 권유하였다.

프란체스코의 형제들이 온유와 친절에 의한 선에로의 봉사라는 평화와 화해문제를 자신의 활동의 중심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분위기에 있어서는 매우 갑진 것이었다. 제국종교로서 교황이 세상의 왕까지 지배하게 되고 십자군 원정까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겸손한 빈자(貧者)로서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무언의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제국종교의 수호자로서 당시 바티칸은 이 도전을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프란체스코 회원내에 온건한 요소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환대를 베품으로서 그와 교회사이에 비극이 연출되었고 이로 인해 프란치스코는 교회에 순명하면서도 말년에 매우 괴로워 하였다.
 

태양, 바람, 물, 불 그리고 죽음조차 형제가 되다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즐길 수 있게 되어 매우 행복해졌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노래하자고 청하였다. 편도나무앞에 가서 그는 말하였다. “아우 편도야, 하느님 이야기를 해 다오.” 편도나무는 마치 미풍에 흔들리듯 몸을 가볍게 떨고는 봄이 덮쳐오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꽃을 피워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가난은 근본적으로 물질 소유의 포기를 넘어 개인이 다른 사물을 그 나름대로 있게 하는 존재 양식과 관련된다. 사물을 지배나 복종시키는 대상으로서 그들 위에 있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가난할수록 더 자유롭고 우애를 경험한다. 보편적 형제애는 그가 가난하게 사는 길의 결과이다. 이로인해 작은 자들과 더불어 모든 사물이 존중되고 경외하게 된다. 모든 사물은 초월적 실재로 인한 투명성을 발휘하게 되며 세계적인 화해와 더불어 우주적 형제애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꽃들에게 설교하고 주님을 찬미하자고 청하며, 물, 땅, 불, 공기 바람 등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부르고 지극한 온유한 감정으로 감싼다.

여기에 새로운 삶의 길이 존재한다. 사물위에 존재하지 않고 세상 및 자연과 더불어 형제자매처럼 사는 길이 열려진다. 겨울에 굶주린 꿀벌들에게 꿀과 포도주를 제공하고, 덕행이 지혜여왕님, 종달새가 종다리누이, 늑대형님, 대지누님, 태양 큰 형님 그리고 죽음조차 누이로 여겨진다. 그에게 세계는 온갖 경외로 가득차며, 한 하늘 아버지 밑에서 혈연의 관계를 맺는 존중의 대상이 된다.

우주의 위대한 한 주인밑에서 모두가 의존해 있으며 모두가 아버지의 한 집안에서 산다. 따라서 원수란 있을 수 없다.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눈 수술을 할 때도 뜨거운 인두에게 <불형님>에게 고통이 없도록 간청을 한다. 그리고 불형님이 자비를 베풀어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시 <태양의 노래>의 예처럼 그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는 귀뚜라미와 종달새와 더불어 찬미가를 부른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이다. 이는 단순한 낭만주의가 아니다. 깊은 자기정화와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수행을 통해 나온 노력의 결과이다. 

그의 자기정화의 철저함의 노력은 결국 1224년 9월 알베르나산 위에서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의 흔적이 그의 몸에 나타나게 된다. 이 오상다음으로 눈이 멀게 된다. 내적인 빛이 완전히 외적인 빛을 꺼버리게 되고, 자기 마음에 지상낙원을 건설하였다. 순수한 열정과 환희 그리고 명랑성, 모든 사물과 수난 동반자로서의 연대, 자연에 대한 축복과 우주적 민주주의, 지극한 겸손으로 가장 미소한 것들과 하나됨 등이 그것이다. 피조물 전체가 환호작약한다. 보나벤투라의 진술이 이를 증언한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석탄과 같이 그는 신적인 사랑의 불길에 타버린 것 같았다.”.

그가 임종시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대지위에 벌거숭이로 눕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철저한 자신의 무화(無化)를 통해 대지와 일치, 아니 자연만물형제와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1226년 10월 3일, 모두가 무서워하는 죽음의 사자를 ‘죽음형제’로 초대하고 죽음을 찬미하며 죽음형제를 받아들인다. 


사랑으로 상대의 잘못을 치유하다

“만일 네가 사랑하면 사랑함을 받을 것이며, 네가 무서워하면 다른 이가 너를 또한 무서워할 것이다. 또 네가 남에게 봉사하면 남이 네게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이를 초월한다. 타인을 사랑하되 사랑받기를 원치 말며, 남에게 봉사하되 남이 자기에게 봉사하기를 원치 말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되 남이 자기에게 호의 베풀기를 원치 않는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된 자이다.” 

프란치스코의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해방전략은 그가 사회적 역사적 갈등을 대할 때 대한  태도와 독창성에 있다. 이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이해된다. 첫째는 부르고 산 세풀크로의 도적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둘째는 구비오의 늑대 이야기이다. 첫째 예화로 보면 도적들은 숲에서 나와 길가는 나그네들을 겁탈하곤 한다. 하루는 이들이 하도 배가 고파 형제들의 은수처에 와서 빵을 달라고 청한다. 이들의 곤경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형제들은 그들을 도와준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상항을 처리한 단계는 다음과 같다.

* 가장 좋은 빵과 포도주를 숲으로 가지고 가서 외쳐라 “도적 형제들이여, 이리 오시오. 우리는 당신의 형제요. 그래서 좋은 술을 가지고 왔소.” 도적들이 와서 형제들이 대접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는다.

* 그런후 그들은 도적들에게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별 성과도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이 진실로 할 수 있는 것을 청한다. 즉 도덕질을 할 때 사람을 치거나 해치지 말라고 부탁한다.

* 그 다음날, 형제들은 같은 절차를 반복하되 다만 빵, 달걀, 치즈 등과 같은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

* 도적들이 먹고 난 후에 새로운 제안을 한다. 즉 그 고통스럽고 배고픈 생활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을 알려 준다.

* 마침내 형제들의 정중한 태도와 친절 때문에 도적들은 회개를 할 것이며 그들 중 몇은 형제회에 가입하기를 청할 것이다.

여기에는고발, 질책, 비난등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프란치스코의 전략은 선과 예의, 인내와 각 개인 속에 잠재한 치유의 능력에 대한 신뢰, 보살핌과 이해로 말미암아 이 치유이 힘이 발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곧 우리가 도적을 온유하게 이해하며 보살핀다면 개개의 도적 안에 잠재해 있는 거룩하고 착한 형제가 구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친절을 통하여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그의 전략이다.

구비오의 늑대 이야기는 산에 사는 “크고 무섭고 사나운” 늑대와 무장을 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도시에 사는 다른 (인간)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서로 적대시하며 오직 폭력과 상호 파괴의 적의 이미지를 갖고 그런 증오의 관계만을 맺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이들이 행하는 공포로 인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식의 휴전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노선은 복음주의적인 것으로 각자가 방향을 바꾸어 타인을 향하여 방향을 잡을 때에만 발견되는 새로운 길이다. 여기서의 해방적 도전은 두 종류의 늑대들로부터 그들안에 있는 선함의 의지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해결방식은 다음가 같다:

* 그는 자진하여 늑대가 다니는 길로 나아간다. 아무런 자기 무장없이 복음에 매료된 한 가난한 이로 나아간다. ‘늑대형제여, 이리 오너라’ 그는 형제다운 언어로 늑대의 턱을 다물게 한다. 그는 늑대로 하여금 ‘도둑이요 살인자로서 처형당할 만한“ 상황임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이 모든 것이 배고픔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이해한다. 필요한 음식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듣고 늑대는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프란치스코는 그 늑대를 늑대 형제, 곧 새로운 존재로 회심시킨 것이다.

* 그는 옳고 그름의 이유를 따지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서 회심에 초대한다. 그래서 숲의 늑대가 인간의 처소에 자주 드나들고 사람들은 늑대에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이 평화는 한편이 다른 한편을 이겨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편이나 당파를 극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를 돌보게 되는 자비의 실천이 실지로 일어나게 된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