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 민주화의 거인, 이상철 선생님을 찾아서
● 만남과 대화 - 동덕 민주화의 거인, 이상철 선생님을 찾아서
< 이상철 동덕여대 공동투쟁위원회 자문위원 >
"동덕여대 죽 쒀서 개줬다"
이 말은 2006년 초, 동덕 민주화 공동투쟁위원회(이하 공투위)가 주최하는 한 기자회견장에 울려 퍼진 말이었다. 이 한마디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면서 동덕의 상황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결정적 키워드가 되었다. 이 촌철살인의 말로 2006 동덕 민주화 투쟁에 불을 지핀 사람은 공투위 자문위원이면서 사립학교개혁국민운동본부(이하 사학국본) 정책자문위원인 이상철(72) 선생이다.
투쟁 현장에 가보면 맨 선두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손봉호 전 총장이나 박상기 전 이사장 등을 거침없이 꾸짖어대던 그를 오늘은 학교 밖에서 만났다. 그는 산본의 한 조그마한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김밥과 볶음밥
마침 점심시간이라 가까운 돌솥밥 집으로 옮겨간 우리는 대뜸, 투쟁현장에서는 언제나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시곤 하셨는데, 오늘은 성찬이라고 하자,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이따금은 혼자 학교 앞에서 볶음밥을 사 먹고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볶음밥을 사 먹은 것이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볶음밥을 먹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쑥스러워하는 그 꼬장꼬장한 노(老) 지사는 일찍이 경주의 한 만석꾼의 후예로 태어났다. 아쉬울 것 없이 유복한 성장기를 경주에서 보냈던 그는 30대에 잘 나가는 기업체의 이사, 40대에 전무, 50대에 CEO로 활약한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가 김밥(혹은 학교 앞 볶음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투쟁현장을 누비게 된 인생역정이 자못 궁금했다.
1950년대 대학시절에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회충약 공급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기득권층이었던 그로서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그를 바꾸어놓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유신말기였던 1978년, 내 나이 43살 때였어요. 당시 서울대학교 해직교수였던 한완상 교수를 우리 회사에서 초청하여 임원교양특강을 열었어요. 그 강연에서 한 교수는 기업의 윤리문제, 노동의 신성함, 기독교 윤리문제 등에 대하여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던 중 한 교수에게 강만길 교수와 이영희 교수의 저서를 추천받아 읽게 되었는데 그 것이 의식화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할 수 있지요."
<2006년 8월 28일 명동 롯데호텔 앞 총장사퇴 촉구 장면 >
그 후 그는 한완상 교수와 함께 활동하면서 유신반대 발언을 하여 정보부에까지 추적을 받아야 했고, 한 교수와 함께 세운 평신도 교회 헌금으로 민주화 투쟁 운동 단체들 (NCC인권위원회, 해직교사후원회, 민가협 등 50여개 단체에게)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전교조 해직교사 후원회" 활동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사립학교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6년 대학에 사무처장 겸 재단 사무국장으로 들어가 일 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우리나라 사립학교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썩었는가 하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이 사립학교법 개정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동덕을 비롯하여 세종대, 청강문화산업대 등 사립학교 분규 현장을 발로 뛰게 되었다.
무거운 서류가방
투쟁현장에서 본 그는 참 인상적이다. 그는 간단명료하면서도 핵심을 찔러 가차 없이 말하는 것이 특징이 있다. "동덕여대 죽 쒀서 개 줬다"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2006년 여름, 그는 손봉호 전 총장 면전에서 "학생들을 탄압하는 당신이 교육자이냐? 어떻게 기독교 지도자라 할 수 있느냐?"하고 몰아붙였다.
박상기 전 이사장에게는 또, "법정 전입금으로 내어놓아야 할 11억 원은커녕, 겨우 1000만원 내 놓고 운전사 딸린 관용차를 몰고 다니느냐? 당신이 구재단보다 잘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의 그 가차 없는 비난 앞에는 그 누구도 대꾸를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언제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증거수집광이다.
투쟁에 앞서 그는 철저히 증거수집부터 한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다닌다. 투쟁현장에 갈 때도 언제나 서류가방을 들고 갔고, 우리와의 인터뷰 현장에도 한 무더기의 서류를 꺼내놓고 조목조목 적시하면서 이야기했다.
"내 사무실에 가보면 서류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요. 동덕 문제 자료만 해도 한 무더기지요."
어떤 증거는 몇 달이 걸려야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했다. 그 철저한 실증적 방법 때문에 그는 언제나 이길 수밖에 없고, 그가 들어가면 어떤 분규 사학도 해결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언론 홍보의 귀재
그러나 그의 투쟁 방법에는 다만 증거를 모아 야단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문제의 핵심을 알기 쉽도록 간단명료하게 표현하여 언론에 홍보한다. 그는 언론 플레이의 귀재다. 지난해 각종 매체의 기자들이 벌떼처럼 동덕에 몰려들었던 것도 알고 보면 그의 노력이 크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는 기자들에게 전화하여 브리핑을 한다. 좀 게으름을 피우는 기자가 있으면 수시로 전화하여 기사를 쓰도록 독촉한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사가 잘 나오면 그는 소년처럼 기뻐하며 그것을 복사해 가지고 다니면서 무슨 대단한 선물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한다. 그러나, 어쩌다 기사가 오류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즉시 전화하여 정정보도를 내도록 한다.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기자들은 기사 쓰기가 쉬웠을 것이고, 기자들은 동덕 문제에 대하여 보다 흥미를 갖고 취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그의 주변에는 항상 기자들이 몰려다닌다.
"나의 임무는 악역"
철저한 증거 수집과 언론 홍보, 우리가 보기에 그의 투쟁 방법은 지극히 과학적이고 현대적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이렇게 말한다.
"공투위 안에서 나의 임무는 악역을 담당하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는 그래도 유교적 전통이 있어서 젊은 교수들이 나이 많은 총장이나 이사장에게 함부로 말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나는 나이가 많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그 웃음에서 우리는 사리사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익장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분명 악역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젊은이들에게 불의 앞에 분연히 나서게 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투쟁방향의 변모
사학과 관련한 그의 오랜 투쟁은 시기에 따라 방향이 변모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덕 사학을 고발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투쟁이 계속되면서 그는 이 나라의 사학부패는 구조적으로 교육관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육 관료들의 나태와 부정이 사학 을 부패시키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부패한 교육관료가 있는 한 사학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어요. 그래서 사학재단에 대한 초기 감정은 오히려 줄어들었어요."
교육관료들의 부패를 추적한 그는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교육마피아"라는 제하의 이춘제 기자의 기사를 통해 고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기사는 20명의 교육부 관료들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그들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의 투쟁은 최근에 제 3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교권문제이다.
"교수신분이 이렇게 취약한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말한 그는 교수 계약제 임용과 관련한 법률 조항을 내보이며, "이 법을 악용하면 교수들은 현대판 노비문서에 계약을 하는 것이 되지요" 하고 말했다. 교권이 위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부당하게 해직 당한 교수들의 복직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니, 현재는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해직된 안태성 교수를 돕기 위하여 발로 뛰고 있다.
교수들의 권익을 보호해주기 위해 뛰고 있는 그에 대하여 공투위의 어떤 분은 한마디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강의전담 교수들 문제가 해결되는 날, 이상철 선생님의 투쟁도 끝이 날 거예요."
"교수들이 불쌍해요"
그 오랜 투쟁을 해오면서 회의감이 들 때는 없었는지 물었다.
"가령, 지난 가을 학생들이 이사회장 앞에 몰려가 난동을 부리고 천막 불태우고 하는 걸 보면서 내가 무엇을 위해 투쟁을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학생들이 대부분 교수들의 사주를 받아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해가 갔어요. 이 학교 교수들 꼴을 보면 학생들 행동이 오히려 이해가 갑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했다.
"또, 강의전담 교수들을 돕기 위하여 전화를 하면 어떤 강의전담 교수는 ‘아이고! 선생님, 제발 전화하지 마세요’ 하고 애원을 해요. 학교당국에 잘 보여 혹시라도 전임교수가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는 교수들이 나하고 내통하고 있다는 걸 알면 그 희미한 희망마저 사라진다고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교수들을 보면 교수들이 불쌍해요."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는 그는 투쟁을 하느라고 외국은 물론이고 가까운 에버랜드나 민속촌에도 못 가봤다고 하면서, 이점이 부인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2007.6.10.) 자료출처:http://ddufam.or.kr/ddufamzin/ddufam03.htm#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