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이야기

[여수이야기 1] 가난한 이야기

침묵보다묵상 2013. 3. 22. 16:48

 

 

[여수이야기 1] 가난한 이야기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이용악 시인의 시 '전라도 가시내' 전문)

내가 전라도 가시내와 살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할 줄은 몰랐다. 내가 전라도의 눈물과 분노를 맘에 품고서 술에 취하고, 싸우고, 소리칠 줄도 몰랐다. 전라도는 나에게 절망을 준 곳이고, 방황을 가르쳐 준 곳이다. 인생의 바퀴를 굴린 것은 나 자신이었지만 그 바퀴는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오십 중반이 되어서 겨우 깨닫는다.

나에게 여수(麗水)는 피눈물의 도시이고, 그리움의 도시이다. 나에게 여수는 아픔의 도시이고, 정겨운 선후배와 친구들이 사는 도시다. 그래서 나는 여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었다. 그런데 삶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자 피눈물과 아픔의 여수가 아닌 그리움과 정겨움 여수가 나의 마음을 흔든다. 여수이야기가 하고 싶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 <여수부르스>를 통해 전하는 나의 가난한 이야기를 고이 들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