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위하여/가난의 영성

[스크랩] 한국의 슈바이처’장기려/ 기독교 사상11월 호에 기고한 글

침묵보다묵상 2011. 8. 17. 14:29
한국의 슈바이처’장기려/ 기독교 사상11월 호에 기고한 글
  

    한국의 슈바이처’장기려 그 사람 월간 <기독교 사상>11월 호에 기고한 글 ‘한국의 슈바이처‘살아 있는 성자‘바보 의사‘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우리 곁을 살다간 성산 장기려 선생(1911-1955)은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다. 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진실과 정직을 포기하느니 감옥행을 결심할 정도였다. 1950년대 초반, 장기려 선생 은 수술 중에 출혈점을 잡지 못해 결국 환자를 사망시킨 일이 있었다. 장기려 선생은 경찰서에 가서 자기의 실수로 환자가 죽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경찰은 “면허증 있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소. 할 수 없지 뭐” 하며 풀어주었다. 선생의 이런 고백은 그의 생애에서 반복되었다. 장기려 선생의 또 다른 인간됨은 어떤 사람을 거지, 대통령, 행려병자 등 그가 가진 권력·돈·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은 이북에서나 이남에서나, 그러니까 젊었을 때나 나이가 많았을 때를 막론하고 자기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아내가 40년 만에 남편의 사진을 받아들고 자식들에게, “두 개 가지면 벌받는 줄 아시는지 번번이 거지에게 옷 벗어 주고 퍼렇게 얼어서 들어오셨어. 내가 부엌에서 굶는 것도 모르시곤 길 가는 거지들을 불러와서 겸상 차려 먹이신 양반”이라고 했겠는가. 차남 장가영의 집에 머물 때는 가정 일을 돕는 아주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차별한다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생이 6·25전쟁 이후 우직스럽게 무료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은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의료보험을 시작하기 10년 전에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몇 년 뒤 보사부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차별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에게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 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가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선생의 가장 훌륭한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신분이 높든 낮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이루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상실된 창조 당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선생의 어떠한 업적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인간됨에 매료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과 맞서는 모습이나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인간 됨에 매료된 나머지 선생이 의학도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놓친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그런 점에서 이제까지 나온 선생의 전기들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많다) 선생의 차남 장가영 박사가 회고하는 아버지는 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이었다. 1947년에 김일성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때, 다른 교수들은 일본 의학서적을 번역하여 강의했지만 장기려 선생은 영어 원서로 가르쳐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고 김일성대학 교수 가 되었지만 3년이 지난 6·25전쟁 직전에는 소련의 첨단 외과학 서적을 번 역하라고 김일성대학이 공식 휴가를 내 줄 정도로 러시아어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급하게 부산까지 피난 와 제3육군병원에 근무할 때는 오가와(小川) 교수가 쓴 외과학 책을 암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 의관들에게 막힘없이 강의할 수 있었다. 1953-1956년까지 이미 서울대 교수를 지냈던 선생은 1959년 또 다시 서울의대 로부터 교수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계속 받았다. 복음병원 때문에 몇 년째 고사하던 선생이 1961년에 스스로 서울대 교수가 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새까만 후배 민병철 박사가 미국 의사 라이센스를 획득하고 서울대로 돌아오 자 그에게 미국 의학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생은 70이 넘어 선진 의학을 공부하고 들어 온 후배 의사들에 비해 자신의 전문지식 이 크게 뒤지고 수술도 예전만 못하여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80이 다 된 나이에인제대학 의과대학 대학원생 강의에 들어가 후배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의학지식을 익히며 자신의 존재 의의를 회복했다. 선생이 수술 직전에 늘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수술을 앞두고 해당 의학 서적을 다시 한 번 공부한 후 수술실로 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선생이 학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은 1992년에 뇌혈관 장애로 쓰러졌을 때였다. 선생은 3개월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자신이 69년에 지은 외과학 교과서에 오류가 있는 점을 발견하였다. 당시 선생은 오른쪽에 마비가 와서 글씨를 쓸 수가 없었던 관계로 제자에게 타이핑을 부탁하여 교재 편집위원 교수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제가 된 것은“《외과학 각론》 356 page 아래에서 열 번째 줄” 딱 한 줄이었다.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조롱거리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양적 성장을 내세 우며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호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한국 교회들은, 최근 더 탐욕스럽고, 더 뻔뻔스럽고, 더 사악한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선생은 일제 때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 교회에 크게 실망하였다. 해방 후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교회들의 독선으로 한국교회가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70년대부터는 교회가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면서 벌이는 온갖 추태를 지켜보아야 했다. 때문에 선생에게 있어서 교회 개혁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선생은 교회 개혁을 열망하다가 77살에 진정한 교회 개혁을 실천하는 작은 무리들을 만난 후 장로로 평생을 봉사한 산정현교회를 버렸다. 늘그막에 찾은 진정한 교회 개혁 공동체라 확신한 ‘종들의 모임’을 위해 자신이 한국 교회 안에서 누리고 있었던 모든 명성이나 관계들을 포기했다. 나는 한국 교회의 젊은 청년들이 선생의 이웃을 향한 무한 봉사와 함께 진정한 교회에 대한 눈물과 애정, 그리고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본래 기독교에 대한 동경을 배웠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2002년 대선을 분기점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였다. 비교적 단순하던 좌와 우의 이념적 갈등은 극좌와 좌파 사이, 진보와 개혁 사이, 그리고 냉전적 수구와 합리적 보수 사이의 싸움으로 더 한층 복잡해졌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유지하는 일이 매우 힘겨워 보인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념의 문제이든, 문화적인 취향의 문제든, 우리 사회는 의견 차이 앞에서 너무 쉽게 이성을 잃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 앞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또한 너무 쉽게 상실된다. 장기려 선생은 기독교 교파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고신대학 복음병원에서 수십 년 동안을 병원장으로,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선생을 배출한 보수적인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40년 이상을 봉사했다. 그런 가운데서 선생은 당시 한국교회가 거의 이단시하던 무교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부산모임을 32년간이나 이끌었다. 교단이나 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일 뿐 아니라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 선생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며 매월 그 분을 공개적인 성서모임의 강사로 모셨다. 어떤 때는 함석헌 선생의 공개성서 강좌를 산정현 교회로 유치하기도 했다. 선생은 함석헌 선생과 처음 첫 만남을 가졌던 1940년 이래, 공산 치하에서든, 6․25 전쟁 중이든, 또는 군사 정권 하에서든, 심지어는 함석헌 선생이 ‘분홍색 스캔들’로 진보 진영의 일부 인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때조차도 한 결같이 그의 곁을 지켰다. 스승 유영모 선생마저도 끝내 외면했던 함석헌을 선생은 죽는 날까지 친구로, 또한 결정적인 재정 후원자로 관계를 유지했다. 선생은 함석헌 선생 사후에 부산모임을 접게 되는데, <부산모임>에 쓴 종간사의 한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부산모임의 사명 중 일부는 함석헌 선생께서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지금 이 땅의 지식인이나 정치인, 심지어 종교인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나는 함석헌 선생 주변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장기려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정치적 보수성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점은 선생 주변의 친구나 후배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선생이 너무도 정치적이고 신앙적으로도 혼란스러운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두 분이 걸어 온 길은 달랐지만, 함석헌과 장기려는 평생을 함께 한 신앙과 삶의 동지였다. 저들의 다름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었고, 취향은 본질을 흔들 수 없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함석헌과 장기려가 자신들의 주장이나 취향을 숨기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아수라 같이 변해버린 정치판을 보면서, 그리고 지엽적인 차이로 상대방의 인격까지 죽이려드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싸움들을 보면서 선생이 그리워진다. 장기려 선생은 해방 후 북한 공산 치하에서 5년을 살았다. 사실 북한 정권 치하에서 선생의 5년은 승승장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선생은 끊임없이 감시에 시달려야했다. 긴장을 너무 한 탓에 종종 구토를 했다. 월남한 뒤로 선생은 이미 1968년부터 민족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한국전쟁이 지난 지 6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북한에 대해 증오로 일관하는 우리 사회의 보수 원로들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진보 그룹이 주장하는 통일이나 북한에 대한 생각에 선생이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동포는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 일당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했다. 선생은 형식적으로 김일성을 위해 기도했던 게 아니다. 1983년의 아웅산테러사건 전까지 그는 김일성 부자와 그 일당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다. 통일은 저들이 전쟁의 책임을 지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웅산테러사건 이후 선생은 자신의 완고 함을 깊이 회개하고 그들을 위해서도 눈물로 기도했다. 어떤 글에서 선생은 “김일성님”이라고까지 호칭한다. 선생은 “사랑이 없다면 이념은 쓰레기” 라는 지론을 평생 유지했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갈등과 남북문제를 바라보면 서도 선생이 그립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이야말로 통일의 실마리를 풀 열쇠를 쥐고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장기려 선생은 약 500여 편의 글과 90여 편의 번역 원고를 남겼다. 거의 모두가 기독교적인 내용이다. 때문에 선생의 사회봉사에 깊이 매료되어 그를 더 깊이 알려 할 때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너무도 기독교적인 내용으 로 그의 글이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른 신앙을 가졌거나 무신론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술어를 찾기 위해 고심을 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로서 어떻게 하면 유물론 (무신론)자들에게 같이 이해될 수 있는 술어(단어)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들에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라고 말을 하면, 알아 볼 생각을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곧 적개심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진리)을 표현하는 술어는 무엇일까?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단어는?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귀중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이 평생 이룬 업적과 의사로 서의 실천에 누구나가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비기독교인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스님, 신부님 을 선생이 주최하는 부산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기꺼이 환영했다. 선생의 실천적인 사회봉사는 물론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이 비기독교인 들을 섬기려는 것이었다. 자신의 묘비에 오직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선생으로 하여금 평생 남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게 만든 요인은 누가 어떤 각도에서 조명한다 해도 기독교 신앙이었다. 선생의 신앙을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분들에게, 또는 진보의 색채를 지닌 신앙인들에게 다소 불편할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다 주었던 의사였다. 그리고 선생은 그것을 줄 때 조건을 달지 않았다. 이것 받고 예수 믿어야 한다거나, 예수를 믿으니 내가 이런 것을 너에게 준다는 식의 생각이 선생에게는 없었다. 선생의 말이 혹시 어떤 사람들을 거슬리게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분의 실천은 그런 사람까지도 끌어안았다. 행복은 때때로 이처럼 멋진 역설을 타고 우리 삶으로 들어온다. 추신: 월간 <기독교 사상>11월 호에 기고한 글.


     
    출처 : 예수님 보고파
    글쓴이 : 시온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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