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부친 연서(戀書) 35]
결혼 4주년 그리고 당신 생일
또 다시 새벽입니다.
문을 열어 바깥을 보니 칠흑의 어둠입니다.
석탄처럼 시커먼 정선 아우라지의 어둠은 도시의 어둠과는 색조(色調)부터 달랐는데 어찌나 어둡던지 움칫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놀란 마음으로 급히 문을 닫았습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저는 어둠을 몹시 싫어합니다. 어둠은 어둠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흔들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열 살 무렵이었을까요? 밤 봇짐 쌌다가 수년 만에 돌아온 어머니가 아버지와 싸우고 또 다시 집을 떠날 때도 어둠 속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잠든 삼형제 중에서 저에게만 '잘 있어라!'는 귓속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떠났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들은 이별의 귀띔에 깨어난 저는 오목교 정류장까지 맨발로 울며불며 뛰어갔고, 새벽어둠을 싣고 떠나는 버스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머니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어둠 속의 계곡 물소리가 요란합니다. 창문을 슬며시 열어 정선 아라리의 청정한 바람을 들여 마십니다. 검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니 그 기억이 다시 살아납니다.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용산발 완행열차를 타고 밤늦게 도착한 가야산 해인사, 도를 닦기 위한 입산이 아니라 갈 곳도 모른 채 정처 없이 헤매는 막막한 인생이 싫어서 선택한 잠행이었습니다. 스님이 된다면 시립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비명횡사 한 아버지의 가엾은 영혼이 극락왕생하도록 기도드리고 싶었습니다.
돌산 임포에서 '오시끼'(정치망 어업) 배를 탔지만 뱃놈이 되진 못했습니다. 여수산단과 거제 옥포조선소 등 공사판을 떠돌았지만 용접공도 십장도 되질 못했습니다. 행자생활을 했지만 얼치기 노릇이어서 수도승은커녕 절밥만 축내고 달아났습니다. 이런저런 장사를 했지만 돈을 벌지도 못했습니다. 노동해방을 외치며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지만 운동가는 되지 못했습니다. 시 쓴다고 했지만 영혼을 살릴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한 채 제 영혼만 괴롭혔습니다.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인생,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파멸의 낭떠러지로 치닫던 저의 생명을 구해준 이는 주님의 보혈입니다. 저는 구원 받을 어떤 자격도 없는 자였는데, 예수쟁이들은 위선적이며 교회는 정의의 편이 아니라 불의한 권력을 옹호하는 집단이라며 비난했는데, 특히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파는 교회에 그 무슨 진리와 정의와 구원이 있을 수 있느냐고 정죄하고 성토했던 자였는데….
저에게 예수쟁이들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우롱과 비난의 대상이었고 기피와 회피의 존재들이었으며 그들이 다가오면 얼치기 유물론자였던 저는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다!', '기독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다!', '불의한 권력자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주는 정치목사들은 심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부자만 환영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다!', '예수쟁이들은 위선자들이다!' 등등 교회에 가선 절대 안 되는 이유를 수없이 나열했습니다. 아집과 독선의 유물론자가 슬픔과 절망에 빠졌을 때 저를 구해준 분은 사회과학이나 교조적 정의가 아니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의 부탁으로 저를 구해주고, 두 아들을 살리면서 치유의 어머니가 되어주신 당신은 제 사건의 목격자이자 가담자입니다.
결혼 4주년, 곁에 누운 당신
석탄보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우르릉~우르릉~쾅쾅~' 천둥 번개가 내려쳤습니다. 혼자라면 질겁했을 것입니다. 제 곁에 누운 당신은 어둠도 천둥 번개도 상관없이 곤히 잠자고 있습니다. 천둥 번개가 치면 당신이 놀랄까봐 당신의 가슴과 손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제 손을 슬며시 잡았습니다. 바깥에선 어둠과 계곡 물소리와 천둥 번개가 요동치지만 저는 당신으로 인해 평안하게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부부로 택함 받은 지 4주년이 됐습니다. 살 섞으며 사는 것, '여보'라고 부르는 것, 한 솥밥을 차려 먹는 것,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을 함께 가는 것, 아이들을 챙기고 먹히고 입히는 것, 현관에 신발이 여러 켤레인 것, 여자 속옷과 남자 속옷이 세탁기에 함께 엉키었다가 빨래 건조대에 나란히 널리는 것…. 이렇게 많은 것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10년은 넘게 부부로 살아온 것 같은데 이제 겨우 4년차라니….
일출도 없이 새벽이 밝아 왔습니다.
우람한 나무들로 우거진 앞산에는 비안개가 자욱합니다.
산과 계곡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였으니 결혼 4주년을 맞아 떠난 이번 여행을 '정선기행'이라고 명명하렵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당신에게 편지를 쓰느라 두들기는 자판 소리에 깨어난 당신이 앞산의 안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새벽을 지새운 저를 위해 따듯한 커피를 끓여 주셨습니다. 한 잔의 커피로 맞이하는 결혼 4주년의 행복감이 앞산의 안개처럼 뭉클뭉클 피어납니다.
당신은 저를 새롭게 빚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버림 받은 것도 부족해 아내였던 여자에게마저 배신당하면서 '다신,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이를 갈면서 불신과 원망의 칼을 품고 살아온 저를 녹이고 녹여서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그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나요. 여전히 가난한 저는, 저로 인해 당신마저 가난해졌으므로 몸 둘 바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께 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당신이 입혀준 사랑을 신세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변했어요! '그건 안 돼요!', '당신이나 해요!'라며 매사에 부정하던 당신이 이젠 '할 수 있어요!', '우리 함께 해봐요!'라고 말하는 긍정의 사람으로 변했어요!"라며 저를 격려하였습니다. 저의 입술과 심장에서 감사와 기쁨이 샘솟는 것은 저로 인함이 아니라 버려진 제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고 보듬어주신 주님의 은혜요, 당신을 저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쉰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당신에게
다시 새벽입니다.
기차 한 대가 새벽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이 새벽에 깨어난 것은 기차의 굉음 때문이 아닙니다.
새벽에 깨어난 것은 우둔한 제가 아니라 성령의 세밀한 소리에 일어난 또 다른 저입니다. 저를 깨워주신 그 주님이 '나의 보혈을 위해 눈물을 흘려다오!', '감사와 기쁨의 노래를 불러다오'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구성진 눈물과 노래는 어디로 가고 마른 가슴을 치는 주먹만 있습니까?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쓰던 열애의 편지가 그립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바친 간구의 기도가 그립습니다.
그 사랑을 맺게 하시려고 열정의 편지가 되어주신 주님이 그립습니다.
그 사랑을 잇게 하시려고 간구의 손목을 잡아주신 주님이 그립습니다.
제 안엔 두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는 병든 옛사람의 불안한 영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 치유 받은 평안한 영혼입니다. 주님께 자리를 완전히 내어드리지 못한 것은 아집과 편견, 미움과 다툼의 속성을 벗지 못한 옛사람의 잔재 때문입니다. 그 원인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홀아비로 살던 때의 생계와 존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삶이 편안해지면서 감사의 눈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랑의 편지를 쓰길 원합니다.
다시, 간구의 기도를 드리길 원합니다.
편지 배달부가 되어주신 그 주님께 눈물의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내민 손 잡아주신 그 주님의 손을 이젠 제가 잡아드리고 싶습니다.
그 마음으로 이 새벽에 깨어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더욱 깊어져서 깨진 아픔으로 상처 받은 이웃들과 그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계산하지 않고 주님께 자리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단순 소박한 믿음을 주소서. 어리석음 밖에는 가진 게 없는 제가 주님의 은혜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소서.
우리 함께 가야할 인생행로는 아직도 아득합니다.
우리의 기차는 실패의 역사(驛舍) 플랫폼에 머물렀습니다.
사업 성공에 부풀어서 바삐 달려가고자 했지만 원치 않는 시련이 브레이크를 걸면서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섰으니 잠시 내려서 우동 한 그릇 먹고 갑시다. 따듯한 국물에 우동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먹으면서 허기도 채웁시다. 잠잠히 생각해보니 우리 스스로가 동력이 되었던 기차는 늘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기차를 주님께 내어드려야겠습니다.
다시 새벽이 밟아옵니다.
어둠은 빛에 의해 지워졌습니다.
도시를 삼킬 듯이 퍼붓던 지난밤의 폭우도 그쳤습니다.
이 새벽에 당신을 불러봅니다. 모든 일에 혼신을 다하면서 일터와 가정에 기쁨의 에너지를 채워 주시는 당신! 그 어떤 어려운 일도 쉽게 푸는 달란트를 가진 당신! 가족을 위해 수고의 짐을 마다하지 않는 당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시련을 헤쳐 가는 당신으로 인해 이 가정은 평안합니다. 당신의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아서 우리의 가정은 반석 위에 세워질 것입니다. 그 반석에선 은혜의 샘물이 솟고 믿음의 아들딸과 미래에 태어날 생명들은 당신이 축복의 통로였음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 형통한 가문을 꿈꾸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이사야 65장 23절)
- 평안의 뜰에 거주하는 남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