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 여자의 재혼일기 13] 남편의 신장기증
남편이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밝힌 것은 결혼 전이었습니다. 몹시 고통스럽던 시절, 하나님께 가족을 이루어주시면, 신장을 기증하신 김정명 담임목사님처럼,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서원했다고 하면서, 신장을 기증하기 전에 약혼식이라도 먼저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참, 10년 연애에 동의할 때는 언제고 틈만 나면 들이댑니다.
2006년 1월 5일 그의 생일에 약혼식을 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언약식처럼 단출하게 하려고 했는데,
소개해 주신 김해성 목사님이 생각지도 않게 준비를 해주시는 바람에 제법 그럴 듯한 약혼식이 되었지요.
약혼식이 끝나고 검사를 했지만, AB형인 것과 검사에서 뭔가 걸려서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그해 8월 결혼하고, 다음 해가 되었을 때, 남편은 다시 서원한 것을 지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2006년 말까지 장기기증 시민단체에서 16년을 일했기에 당연히 하라고 찬성했습니다.
다만 양쪽 어머님들께는 가슴이 아프실 터이니 비밀로 하자고 했습니다.
장기본부에 신장기증을 다시 서둘러 달라고 연락했더니, 전남 광주 29살 청년과 맞는다는 답이 즉시 왔습니다.
지난 번처럼 검사과정에서 걸리는 것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번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입원기간 내내 남편은 평온하게 모든 과정을 잘 마쳤고, 5월 30일 오전 7시에 수술실로 들어갔지만, 학교 가는 아들들을 챙기느라 보지도 못했습니다. 다행히 병원에 도착하니 정언용 담임목사님께서 기다리시다 방금 들어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11시면 병실로 온다는 것과는 달리 오후 1시가 되어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침대에 엎드려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남편의 신장을 받았다고 하는 응답이 왔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700건 이상의 신장기증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는데, 참 이상한 것은, 남편의 신장기증 과정이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 혹은 1건 정도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을 모두 경험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보다 심한 통증, 수술직후 크리아틴 수치가 높아 급성신부전 증세가 보인다는 의사(레지던트)의 지나친 겁줌, 실밥도 빼지 않은 이른 퇴원(병실을 빨리 돌리기 위해 별다른 치료없는 수술환자는 나가서 동네에서 실밥을 빼라는 것입니다.
결국 2일을 더 버텨 6일만에 퇴원해서 이틀 후 동네 의원에서 실밥을 뺐습니다.), 무엇보다 옆구리 수술자국이 켈로이드성피부라나 여하튼 수술자국에 통증이 심하고 수술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피곤하며 그 부분이 많이 도드라지고 가려워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신장기증이 일상이 되어 무덤덤했던 저의 행동에 대해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증하고 건강하게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의 신장기증도 별다른 고민없이 기꺼이 찬성했고, 심지어 아파하는 남편을 보면서 ‘다 과정이야, 삼일 후면 괜찮아.’ 하며 간호사처럼 설명했던 저였습니다. 어찌나 형편없는 간병인인지, 남편은 도움이 안되니까 전문 간병인에게 맡기고 집에 가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신장기증자 가운데 후유증 같은 것을 남편이 모두 겪게 하시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져 일하지 말고, 정말 숭고한 결단과 행동을 하신 사람들의 진정성을 깨닫고 제대로 일하라고 저를 가르치시기 위해 그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장기본부를 나와 혈액원에서 일하던 저는 헌혈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애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들이 먼저 솔선수범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모두들 저의 의견에 적극 동참하여 저희 가족은 모두 장기와 시신기증희망등록했고, 문제있는 저 빼놓고는 헌혈도 매우 열심히 합니다. 만 16세 생일이 되면 아들들은 물론 딸도 제일 먼저 헌혈을 하러 갔고, 지금도 남편과 함께 일 년에 3번이상은 헌혈을 합니다.
추석과 설날 명절이면 전 가족이 터미널 헌혈카페에 가서 캠페인도 열심히 했습니다.
수혜자 어머니가 만나고 싶다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신장을 드린 것이지 수혜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퇴원하는 날, 장기본부 직원이 잠깐 인사는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미안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두툼한 봉투와 편지 같은 것을 2개 내미셨습니다.
허리펴기도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얼른 내가 받아 ‘편지를 받겠습니다. 그러나 돈은 법적으로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냉정하게 돌려드렸습니다. 그래야 그분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어머니의 어깨를 잡으며, “서로 건강해졌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어머니도 이제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하며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신장기증한 것도 잊고 살라고 했는데, 여전히 말썽을 부리는 자국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 않아 걱정입니다.
그 이후 때문인가요? 남편의 입에서는 ‘보혈의 피, 예수님의 피’라는 단어가 가정 많이 나옵니다.
옆구리의 아픔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옆구리를 찔리시고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며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징표가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