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재혼일기 13] 아내는 입원 중
우리 부부의 신장(腎臟, kidney, 콩팥) 가운데 정상 기능 중인 신장은 합쳐서 두 개 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장을 합치면 세 개인데 아내의 신장 한 개는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나머지 하나의 신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두 개가 있어야 할 신장이 하나밖에 없으니 그 하나에 이상이 생기면 막막한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장 하나뿐인 아내는 병균이 침범하면 실제 환자이고, 병균이 침투하지 못할 때는 잠재 환자입니다.
엄살이 심한 저와 달리 씩씩한(깡다구) 아내는 아파도 아픈 표를 별로 내지 않는 성격인데 지난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고열과 통증으로 심하게 앓던 아내는 회사에 바쁜 일 때문에 '이번 주엔 아프면 안 되는데….'라며 되 뇌이면서 억지로 기운을 차려서 회사에 출근했지만 결국 퇴근해 귀가해서는 밤새 신열과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를 데리고 서둘러 한양대병원에 갔습니다. 자신의 지병인 신우신염(腎盂腎炎)이 재발한 것 같다고 느낀 아내는 오래도록 치료를 담당한 교수가 있는 한양대병원을 찾았습니다. 소변검사 및 담당 교수의 진료 결과 예상과 일치했고, 병원 측의 입원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병실이 곧바로 나지 않았고, 아내는 제 무릎에 엎디어 통증을 참느라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병실이 없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환자는 아픔에 시달리는데 어떤 조치도 내려지지 않을 때 그 답답한 심정이란…. 아내는 착한 환자입니다. 아무리 아파도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감내합니다. 혼자 살 때도 연례행사처럼 입원하곤 했는데 노모는 물론 딸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알아서 입 퇴원했습니다.
"연락해서 뭘 해! 괜히 걱정만 하게 만들고 병원에서 혼자 푹 쉬다 나오면 되는데…."
어려서부터 약골인데다 심각한 일 중독자인 아내는 그렇게 쓰러진 뒤에야 쉬곤 했었습니다. 어쩌면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일을 선택한 측면이 있습니다. 신장 기증을 받아 신부전증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오래도록 했던 아내는 그 열정과 헌신으로 인해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서도 그 열정이 발휘되면서 지병이 도지고 말았습니다.
내 무심함으로 발등이 튼 아내여!
병실이 확보됐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갔는데 참 묘합니다. 2년 전 입원했던 1917호 2인실 우측 침대를 배정받은 것입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혈액검사, CT촬영 등 각종 검사를 하고 혈관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으면서 링거를 맞았습니다. 아파도 잘 참습니다. 아픈 이들과 오래도록 함께해서 인지, 오래도록 병과 동무를 해서인지 참 숙련된 환자입니다.
몸 아프면 몸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집안에 근심이 밀어닥치고 가족들은 우울에 갇히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병이 병을 부르고, 가족 간의 불화가 겹치는 등 우환의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하며 살았던 아내는 병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로운 환자입니다. 병균은 몸을 무너뜨리기 전에 마음부터 약화시키기 마련인데, 병균의 침투 생리를 잘 아는 아내는 웃음과 낙관, 기도로 예봉을 꺾으며 병균이 확산되지 않도록 방어선을 칩니다. 이번 병균과의 싸움도 좋은 결과가 예상됩니다.
제 할 일은 그것입니다. 간병뿐 아니라 얘들 식사 및 뒤치다꺼리, 집안청소 등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합니다. 병균이 침투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환자가 있지 않은 것처럼 더욱 깔끔 떨어야합니다. 기특하게도 딸은 설거지를 도왔고, 작은아들은 밥을 해놨습니다. 집안 전선 이상무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뿐 가족들의 태도에 불안과 근심이 없으니 우환은 얼씬도 못합니다.
입원 다음 날, 얼굴도 마음도 환한 아내를 씻기기 위해 세면실로 데려가서 링거주사 줄이 꼬이질 않도록 환자복을 조심스레 벗겼습니다. 적당한 온수로 아내의 머리를 적시면서 샴푸를 했습니다. 손끝으로 머릿속 이곳저곳을 마사지하며 거품 하얗게 일도록 살살 문지른 뒤 온수로 거품을 씻어냈습니다. 손에 비누칠을 한 뒤에 아내의 얼굴과 손발을 정성껏 씻겼습니다. 젖은 머리칼과 손발을 수건으로 닦고 털어내 주었더니 아내의 환한 표정이 더 환해졌습니다.
환자복 아래로 드러난 아내의 작은 발등이 유난히 텄습니다. 마음이 짠했습니다. 시집 낸다고 어쩐다고 하느라 한 동안 무심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입원에 필요한 것들을 챙긴다고 챙겼는데 빠트린 것이 여럿입니다. 발에 바르는 로션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등이 많이 텄네. 내일 로션을 가져와서 발라줄게!"
유난을 떤 것은 아닌데 이 말이 사단을 불러왔습니다. 아내를 건수한 뒤에 집에 갔다 왔더니 아내가 50대 후반 가량의 옆 침대 아주머니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나를 씻겨주고 내 발등 튼 것을 보고 걱정하면서 로션을 가져와서 발라주겠다고 말을 한 뒤 집에 갔잖아.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저씨가 참 자상하네요!' 이러면서 '우리 남편은 뭘 시켜도 툴툴 거리고 몸이 아파도 도움이 되질 않아요. 그래서 집에 가라고 쫓아버렸어요!' 라는 거야. 아주머니는 사업을 성공해서 돈도 많이 벌어서 남편에겐 건물 사주고, 자식에겐 차를 사주었는데 막상 몸이 아프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참 좋겠어요. 남편에게 사랑 받아서요'라고 부러워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인지 남편은 간병도 못하고 주차장에 있는 차에서 서너 시간 있다가 왔다는 거야 글쎄!"
이런 것을 민폐 끼쳤다고 하나요. 무슨 닭살 커플처럼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민폐 끼치고 말았네요. 오늘(28일) 개강을 앞두고 기숙사에 짐을 부려놓으러 가는 딸과 아들에게 아침밥을 챙겨 먹인 뒤 아내에게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칠푼이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능한 아내에 비하면 나는 참 부족한 사람이야.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게 하신 것 같아. 만약 나마저 능력이 있어서 각종 일에 쫓기며 산다면 간병이며 집안일은 누가 할까? 부부 모두 능력 있는 집안보다는 한쪽은 부족한 집안이 혹시 나을지도 몰라. 물론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겠지만 집안의 온기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아. 집안 살림이 되려면 한 사람이 빛을 발할 때 한 사람은 뒤치다꺼리하면서 오순도순 조촐하게 사는 게 더 아름다운지도 몰라!'
봄 햇살 좋은 날에 아픈 착한 아내여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아내가 마침 아플 때 아프게 해서 더 아프지 않도록 예방조치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사내를 파수꾼으로 세워주셔서 아내의 병과 외로움을 돌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살림 넉넉지 않아도 병원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피눈물 나지 않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부부 신장을 합쳐도 비록 두 쪽이지만 네 쪽 못지않은 사랑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봄날 꽃샘바람이 사나웠지만 손잡게 걷게 하시어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하시니 아내 없이 홀로 아픈 사내를, 사내 없이 홀로 아픈 여인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하시니 병원비가 없어 입원조차 못한 아픈 이웃의 피눈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하시니 신장 두 쪽이 병들어 서서히 시들어가는 만성신부전 환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부디, 홀로 아픈 이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병보다 더 아픈 홀몸의 외로움을 치유해주소서! 부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의 돈이 되셔서 그들을 입원시켜주시고 치유해주소서! 부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눈 감은 이들을 가난도 병도 없는 천국으로 인도해주소서! 부디, 신장을 두 쪽 주신 뜻을 헤아려 나눌 수 있다면 나누는 이들로 생명 나누게 하소서!
신장 아픈 아내여
아파도 부디 아파도
햇살 좋은 봄날에 아파다오
화색 좋은 화사한 햇살처럼
부디 환하게 아프지 않게
아파도 부디 덜 아프게
봄엔 더 창창한 솔잎처럼
아파도 푸르게 웃는 그대
아픔도 그리하신다면 좋겠구려
밤새 앓던 신열도 그리하신다면
그대 아픔 보듬으며 쓰다듬으며
그대 아픔에 감염되어도 좋겠네
내 한쪽 신장도 그대 한쪽 신장도
아픈 사랑 싸매는 봄 햇살이겠네
(졸시, '아내가 아프다')
[2009/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