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재혼일기 1] 새해 첫 새벽의 시
눈물의 껍질을
가지런히 벗겨
바람 잘 통하고
햇볕 좋은 헛간에
주렁주렁 매달았더니
떫음마저 사라지고
아픔마저 졸깃졸깃
횐 시설(枾雪)의 사랑이여
여문 눈물은 아프지 않으리
상처 아물면 꽃 피고도 남으리
이제 다신 생채기 없을
건시(乾枾)의 달콤함이여
(새해 첫 날 새벽에 쓴 졸시 '곶감처럼' 전부)
아내는 주전부리를 삼가지만 곶감만은 좋아합니다. 엊그제 시장을 다녀오면서 눈으로만 보아도 침고이게 하는 곶감을 사왔더니 아내가 몹시 좋아합니다. 하얗게 웃는 그 웃음이 시설(枾雪)의 건시(乾柿)처럼 달콤합니다. 이제 젊은 날의 풋풋함은 가고 남은 것은 늙어서 질 날만 남았으나 이 시린 사과처럼 말고, 다신 상하지 않을 건시 같은 졸깃졸깃한 정을 나누며 늙어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 한 편 썼습니다.
곤한 잠에서 깨어보니 2009. 1. 1. 03:00, 그야말로 신 새벽입니다. 어제, 아내의 몸살 기운 때문에 송구영신 예배 참석 계획을 취소하고 밤 9시 이전에 일찍 귀가했습니다. 이불 겹겹이 덮고 잠들었던 아내가 깨어나더니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게 습관인, 그래서 웅크리고 자느라 몸이 차갑기 일쑤인 제 몸에 또 다시 이불을 덮어주는 인기척을 느끼면서 잠 깼습니다. 저의 송구영신은 이불을 덮어주는 사랑으로 인해 묵은 날은 가고 새날이 열렸습니다.
송구영신 그리고, 스테이크 무한리필
2008년의 마지막 날을 포식(飽食)으로 장식했습니다. 홍대 정문 앞에서 와인 바를 운영하던 아내의 모임 멤버가 최근 스테이크를 무한 리필해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시식을 하고 온 아내가 '맛이 끝내 준다'고 귀띔하더니 먹성 좋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예약했던 것입니다. 먹는 데 돈 쓰는 것에 인색한 아내가 1인당 25000원인 스테이크 무한리필 프로그램에 투자한 배경은 물론 따로 있었습니다.
다섯 가족의 칼질 중에서 가장 씩씩한 칼질은 먹성 좋은 큰아들(대학교 1학년)과 작은아들(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그리고 저와 딸(대학교 1학년)의 칼질 솜씨는 보통 수준이고, 일처리 때문에 30분 늦게 합류한 아내의 칼질은 돈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두 아들은 등심, 허리 살, 안심, 갈비, 닭 등의 코스에 따라 칼질하기에 바빴고 아이들의 계속된 요청에 따라 무한리필은 계속됐습니다. 두 아들은 이날 10차례가 넘는 주문 끝에 포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날 외식의 주요 목적은 새해 계획 발표입니다. 아내는 매년 마지막 날이 되면 가족 모두에게 새해 계획서 작성을 하달한 뒤에 이를 발표케 하고 벽에 부착합니다. 그런데, 계획은 용두사미가 되고 목표달성은 실종되기 일쑤이기 때문에 아내를 제외한 저와 세 아이들은 부담 백배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명령을 어기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어쨌든 새해 계획을 감동 모드로 짜내야 합니다.
MT맨 큰아들 군대보내기
"저의 계획은 특기병으로 군대 가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을 따는 것입니다."
엄마 옆자리에 앉은 큰아들이 가장 먼저 새해 계획 발표를 했습니다. 08학번 새내기인 아들의 지난해는 정말 공사다망했습니다. 과대표가 된 아들은 각종 MT와 세미나 등으로 집을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최근 총학생회장 선거 운동원으로 얼마나 열성을 다했는지, 선배들이 군대는 나중에 가고 우선 총학 활동을 하라고 부추긴 것 같은데, 그래서 1학년을 마친 뒤 군대에 가려던 계획을 수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1박2일 MT에도 목이 쉬고 몸살이 나서 돌아옵니다. 특유의 친밀감과 잘 놀고 잘 먹는 성격을 보면 MT를 따라가지 않았어도 뭐하고 노는지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총학생회 선배들에게 아들은, 취업문제 때문에 1학년부터 학점노예가 되면서 학생회 활동에 무관심인 여느 학생들에 비해 돋보일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입니다. 학생회 미래 일꾼으로 눈독들인 것입니다.
'이렇다가 큰 일 나겠다!'
아내와 저는 비상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학점(2학기 성적은 3.0 못된다고 함)을 거론하면서 '장학금을 받겠다고 한 공약은 어디로 갔냐!', '니가 국회의원이냐!' 등의 말로 윽박지르면서 1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는 게 왜 좋은지에 대해 강조하며 설득하다가 등록금을 내줄 수 없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랬더니 총학 선배들이 근로장학금을 받도록 해주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벌어서 다니겠다고 맞받는 것이었습니다.
"니가 학비를 마련해서 학교 다닌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무조건 군대에 가라. 시기(4~5월)는 조정해 줄 수 있지만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이틀 전, 아들과의 협상결렬을 선언하면서 군 입대 조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아내는 '제대하면 어학연수를 위해 자금을 마련해 놓겠다!' 등의 회유책과 '아빠까지 포함하면 대학생이 3명인데,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들다!' 등의 호소로 물밑 작업을 했고, 고집 세지 않은 아들은 계획을 수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IT관련 자격증을 딴 뒤 4~5월에 군대 가겠다며 새해 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2009, 새해 첫 새벽에 재혼일기를 쓰면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는 딸은 신학생으로서 성장, 수능모드에 접어드는 고1 작은아들의 계획은 성적향상입니다. 저의 새해 계획은 미루었던 시집(詩集) 발행, 매일 성경 한 장씩 읽고 가족 위해 30분 이상 기도, B~C+학점 취득하면서 휴학하지 않고 졸업하기 그리고, 재혼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상처를 잊고 싶었고, 숨기고 싶었습니다. 상처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소통이라기보다는 생채기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블로거로 변신한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님의 조언과 아내의 동의에 따라 재혼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생채기가 덧나지 않을 정도로 아물면서 피난처는 안식처가 됐고, 불안이 요동치던 마음에 평온이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흠집 난 과일을 주로 삽니다. 일단 싸고 양이 많다는 점이 경제적 선호 이유이고 그와 함께 정서의 밑바닥에는 제 인생 같아서입니다. 광나고 보기 좋은 과일들은 모두 팔리고, 누구도 사가지 않아서 떨이로 수북하게 쌓아놓은 생채기투성이 과일이 남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떨이 과일도 상처 난 부분만 잘 도려내면 때깔 좋은 과일 못지않은 과즙의 향기와 맛을 선물합니다.
저의 꿈과 희망은 대단한 것입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달성하고도 이를 이루지 못하면 다 실패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여생(餘生)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난해와 올해, 앞으로 다가올 어떤 해에도 제 꿈과 희망은 '따뜻한 가정에서 안온한 아내와 사랑을 나누며 자녀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위대한 꿈을 함께 이루어 가실 아내, 사랑하는 이에게 바친 청혼의 시를 새해 첫 날 되뇌어 봅니다.
홀로였던 내가
홀로였던 그대
쓸쓸했던 신발을 벗기어
발을 씻어주고 싶습니다.
그 발아래 낮아져
아무 것도 원치 않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대 안온한 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노래가 되어
(2006. 8. 19일 청첩장에서)
[2009/01/01]